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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웨이 Nov 10. 2018

카메라 초점, '길'에 맞추다

<3>길에서 마주친 우연 그리고 찰나의 감동

길 89. 서울숲의 가을.


길이란 공간은 삶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다른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스쳐지나갑니다. 길은 삶의 공간을 확장하는 출발점이자 제한하는 마침표입니다. 태어나 사라질 때까지 길을 또 걷고 걷습니다.


대학생 시절로 기억합니다. 여러 잡념에 사로잡인 시기였죠. 문득 '평생 연재할 수 있는 콘텐츠 주제가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요. 긴 고민 끝에 떠올린 주제가 바로 길입니다. 당시 길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아무런 목적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이상한 취미 때문이었을까요. 오랜 시간 동안 제 버킷리스트엔 '길을 담은 가치 있는 콘텐츠'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길 69. 오키나와 여행 중 우연히 걸은 방파제 길.


잠시 길을 주제로 한 블로그를 운영한 적도 있습니다. 나름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게시물 3개 올리고 그만뒀습니다. 길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직접 걷지 않은 길을 다루는 실수도 저질렀죠. 이런저런 핑계로 무장한 게으름 탓에 블로그는 인터넷 어딘가에 방치됐습니다. 길을 주제로 한 블로그였는데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길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블로그는 실패했지만 사진 연재를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찍기는 제 오랜 취미였기 때문이죠. 스마트폰이라는 훌륭한 작업도구 역시 늘 제 곁에 있었죠. '다시 한 번 해 보자'는 다짐 아래 길 사진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길 87. 나가사키역 앞 주점 거리.


2016년 6월부터 인스타그램에 길을 담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길에서 마주친 풍경, 길에서 떠올린 잡념을 담은 사진이죠. 2년 반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100장이 넘는 사진을 올렸더군요. 여행 도중, 출퇴근길, 그냥 걷다가 찍은 사진들입니다. 제 나름대로 멋지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한 장면을 공유했죠.


'우연'에 집중했습니다. 길을 찍기 위해 따로 여행을 가거나 시간을 내지 않았죠. 꼭 길만 찍은 것도 아닙니다.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나 생각, 정리하자면 '우연한 감동'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단편적인 기록일 뿐이지만, 보는 이들에게 찰나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사진을 꼽았습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올릴까 말까 고민되는 사진은 스마트폰에서 꺼내지 않았죠. 콘텐츠 풍년인 시대에 또 다른 피로감을 안기고 싶진 않았습니다.



왼쪽부터 길 42. 청계천 산책로.  길 53. 신촌에서 우연히 만난 거리의 피아니스트.  길 75. 대방지하차도를 걷다가.


길 사진 연재를 시작하면서 일종의 '취미병'(?)이 생겼습니다. 길을 걷다가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일단 여러 장 찍고 봅니다. 가끔 지하철, 버스 안에서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뭐 어떻습니까. 제 삶에서 다신 마주치지 못할 순간을 놓치는 것보단 잠깐 부끄러운 게 나으니까요.


저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길을 중심으로 추억을 떠올리는 저만의 회상법을 갖고 있단 거죠. 동네친구들과 왁자지껄 걷던 고시촌 거리, 어릴적 뛰놀던 눈덮힌 약수터 산책로, 자전거여행 도중 감동을 안겼던 이름 모를 길들…, 소중한 추억들의 시작점은 길입니다. 길을 생각하면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 곳에서 쌓은 추억들이 되살아납니다. 제게 길은 추억을 떠올리는 마중물입니다.



왼쪽부터 길 85. 부산 이바구길.  길 86. 태국 방콕 도로.


길을 걸을 수만 있다면 우연 그리고 찰나의 감동을 공유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길을 걷다가 별 볼 일 없는 곳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세요. 그 사람에겐 다시 오지 않을 추억의 순간을 담고 있는 건지 모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추억을 쌓게 될까요. 기대감을 안은 채 길을 나섭니다.


길 50. 여의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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