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축구 지옥주

일하고, 축구 보고, 공 차고… 행복하면서 힘겨웠던 금토일

by 샤인웨이
요즘 날 잠 못 자게 하는 사람들. /출처=대한축구협회.


6월 둘째주는 행복하면서도 힘겨운 시간이었다.


유럽 주요 축구리그 시즌이 끝난 6월은 보통 축구 비수기다. 축구선수들은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휴식을 취하고, 축구팬들은 경기 대신 이적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잠을 이겨내며 TV 앞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물론 4년마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은 제외다.


행복하게도 한국 축구는 비수기를 빗겨갔다. U-20 월드컵, 여자 월드컵, 국대 평가전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열렸다. 한국 축구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할 수 있는 경기들이 몰렸다. 축구 팬으로 행복에 겨운 시간이다.


문제는 시차와 근무. 금토일 일정은 해병대 시절 '지옥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과장하자면 '축구 지옥주'랄까. 해병대 훈련병 시절 경험한 지옥주는 평소보다 수면시간과 식사 배급량을 줄이는 기간이다. 열악한 상황을 조성해 훈련병들의 정신력과 적응력을 높이려는 훈련이다.


축구 지옥주였던 금토일 강행군 일정은 이랬다.


-금: 회사 당직, 밤 11시 퇴근

-토: 새벽 4시, 여자축구 월드컵 한국 vs 프랑스 시청

-토: 회사 당직, 오후 3시~밤 10시30분 근무

-일: 새벽 3시30분, U20 월드컵 8강 한국 vs 세네갈 시청

-일: 오전 8~10시, 조기축구 매치

-일: 오후 5시, 방통대 시험


당직과 중계, 시험 등 바꿀 수 없는 일정이 이어지면서 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3시간 쪽잠을 자다가 축구 보고, 다시 잠시 누웠다가 출근하는…, 미친 일정이었다. 물론 그 누구의 강요 없이 내가 스스로 선택한 강행군이다. 일요일 오전 축구를 포기하면 여유가 좀 생겼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할 축구를 내일로 미룰 순 없으니까.


좀 자다가 일어나 축구 보고 다시 좀 자다가 축구 가려던 계획은 완전히 깨졌다. 한국과 세네갈의 8강전에 앞서 잠을 청했다. 밤 11시가 다 돼서야 퇴근해서 매우 피곤한 상태. 그런데 잠이 오질 않았다. 이불 위에서 뒤척거리다 결국 컴퓨터를 켰다. 경기는 혈투였다. 보는 사람이 지칠 만큼. 전후반 2대2 동점, 연장 3대3 동점, 감격스럽게도 승부차기 끝에 한국이 승리했다. 오전 6시30분이 돼서야 경기가 끝났다. 곧장 축구 짐을 쌌다.


날밤을 샜는데 이상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치 진한 커피를 왕창 마신 것처럼. 영화 같은 경기에서 승리한 흥분감 때문이었을까. 축구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릎과 다리가 따로 노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공을 찼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경기력은 실망스러웠지만. 우리 팀의 유일한 골을 내가 넣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마지막 일정인 시험까지 마친 뒤 집에 돌아와 쓰러졌다. 잠으로 빠져들며 축구 지옥주를 버텼다는 안도감과 왠지 모를 자부심이 느껴졌다. 축구 이기고 공도 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주말이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축구 지옥주를 위한 체력을 키워야지!' 내가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한심한 다짐이다. 뭐, 체력 키워서 나쁠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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