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삶 말하기 11
누군가는 북극성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만으로 바다 건너에 닿으리라 믿었다.
이러나저러나 삶은 괴롭다.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고 살기에는 짧은 수명과 앞만 보고 걷기에는 약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모여 만든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단순하게만 살아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르는 거친 삶에서, 이제는 조잡한 부산물들까지 챙겨야만 한다. 인간사회에서 하나를 멋지게 해내려면 적어도 열은 알아야 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 사는 선택받은 몇몇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넝쿨처럼 얽힌 인생 앞에 수시로 무너진다.
현대인의 지상과제는 내집마련이다. 서울에 가까울수록, 더 비쌀수록, 대출이 더 적을수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일찍 달성할수록 세상은 당신을 성공한 인생으로 칭송한다. 가장 편리하면서 유용하고, 적은 위험으로 높은 이익을 보장하는 부동산은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기 위한 학벌을, 사회적인 존경과 안정적 수입을 위한 직업을, 지성인임을 증명하는 고양된 도덕을, 자신을 지켜보고 인정해줄 인간관계를 채워 넣어야 우리 삶은 비로소 성공을 인정받는다. 물론 조건은 갖다 붙일수록 늘어난다. 웃기는 점은, 이 중 하나만 빠져도 세상은 당신을 깎아내릴 텐데, 모든 조건을 갖추어도 반드시 인정받지는 못한다는 근원적인 불공평에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상실감은 어떤 연유에선지 삶 전체를 잠식한다.
너무 많은 사공은 배를 산으로 끈다고 했다. 그런데 인생은 나룻배보다 더 복잡하고 심성이 악랄해서, 목표하는 가치가 얼마나 많은지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안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돈만을 목표로 앞만 보고 걷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절벽 밑으로 구를 테고, 여러 가치를 모두 쥐고자 뛰어다닌다면 어느 순간 삶의 복판으로 무릎 꿇려진다. 온갖 까닭으로 고되고 드물게 행복한 것이 삶이다.
34년을 한 회사에 헌신한 세일즈맨 '윌리 로먼(더스틴 호프만)' 역시 길을 잃었다. 그는 할부금을 갚고 자식을 키우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다른 평범한 아버지이자 회사원들처럼 먼 거리를 운전하며 상품을 팔았고, 고객과 상사에게 굽신거렸고, 성공한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약간은 허황된 꿈을 품었다. 최대의 목표는 아들 '비프(존 말코비치)'의 성공이었으나, 그것만을 바라보며 일생을 걷다 결국 방향도 자기 자신도 잃어버렸다.
자아를 잃은 윌리는 영화 내내 중심 없이 흔들리는 그의 대사에서 알 수 있다. 스스로 세일즈맨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책하다가 갑자기 자신감을 내비치고, 이웃집 아들 버나드를 공부만 할 줄 아는 샌님으로 매도하면서도 자식들이 그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주절댄다. 비프의 도벽을 비난함과 동시에 종용하며, 자신의 친형 '벤'의 모험심을 존경하는 말과는 반대로 비프에게는 사업가로서의 도전만을 강요한다. 그의 대화는 모두 혼란스럽고 고함으로 점철되는데, 그때마다 초조하고 불안한 그의 심정만이 장면을 찢고 나와 명확히 드러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옥죄었을까. 회사에서의 불안정한 입지, 성공한 친구에게 빌붙는 처지와 짓밟히는 자존심, 자식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실패한 아버지로서의 패배감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을까. 사실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고통은 희미한 과거의 배신일지도 모른다. 나를 이끌어주리라 굳게 믿었던 찬란한 가치와 중간중간의 이정표, 그것들에 기대어 지나왔던 모든 걸음이 무의미한 방황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그를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를 통해 힘겹게 가정을 지탱하는 가장, 혹은 자본주의 사회를 짊어진 직장인들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물이 반영하는 갖은 군상을 관통하는 것은 저마다의 삶의 목표를 좇는 이 세상의 모든 미아들이다. 길 잃은 우리는 북극성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으리라 믿고, 별처럼 많은 암초와 무한히 갈라진 뱃길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인생의 목표가 좋은 집에 있다면 삶을 그 집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원활한 원리금 상환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매 순간 감가 되는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인생 자체를 이자로 지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을 온전히 영위하려 하는지 죽은 후에 무엇 하나라도 더 남기기 위해 사는지. 나는 어떤 가치를 가리키며 걷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