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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꼬꼬 Sep 01. 2020

<열혈남아, 1988>

영화로 삶 말하기 10

삶이 파도처럼 밀려들 때면, 우리는 어떤 약속을 기대어 풍랑을 버티나.


철없는 어른들의 어설픈 누아르는 늘 착잡하게 끝난다. 그들은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막혀있거나, 한숨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나사가 빠져있다. 베일 듯 다려진 검은 정장과 순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몸놀림, 사랑과 의리, 무겁게 허무를 뱉는 담배 한 모금 따위는 지극히 영화적인 착각일 뿐이다. 누아르는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치열한 몸부림에 있다. 그 모습은 제법 꼴사납고 너덜너덜하다.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삶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누아르다.


퀴퀴한 악취가 시각을 타고 느껴지는 골방, 능력은 없고 자존심만 높은 무능한 부하 플라이, 가끔 만나다가 헤어진 작부 애인. 잘 나가는 동료에게는 천대받고 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아화(유덕화 분)는 홍콩 뒷골목을 근근이 기는 전형적인 삼류 건달이다. 내키는 대로 살아온 그에게 내일은 없다. 마지막까지 밑바닥에 엮이다 죽어간 그의 답답한 삶은 명백한, 그리고 고리타분한 누아르임에 틀림없다.


포털에서 열혈남아를 검색하면 역시 드라마 혹은 범죄 장르로 소개된다. 하지만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배경이 범죄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철저하게 로맨스임을 고집하겠다. 폭력으로 빚을 회수하거나 조직원 간 갈등과 협박이 계속되는 장면들 틈에, 남겨진 여자 '아오(장만옥 분)'가 있다. 아화는 처음 아오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며, 먹먹하게 말한다.

 '난 너에게 어떤 약속도 해줄 수가 없어.'


약속을 가능케 하는 상황과 약속이라는 행위는 미묘하게 이질적이다. 누군가는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기 전에 서로가 약속을 지킬 상황이 되는지를 본다. 일상, 경제력, 성향, 능력 외 상대가 가진 다양한 요소를 종합해서 이 사람이 내게 어느 정도의 약속을 해줄 수 있는지를 판단한다. 다른 누군가는 그가 약속 자체를 지키는 사람인지를 고민한다. 이 두 문제는 인과를 따르지 않는 거의 별개의 이야기다. 상황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약속을 무조건 지키는 것도, 약속을 끝내 지켜내는 사람이 꼭 그럴 여력이 되는 상황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삶은 결정적인 순간에 평소와 다르게 흐른다.


관계는 약속을 거듭하는 여정이다. 남겨진 사람은 기다려야 하고 떠난 사람은 돌아와야 하는 약속에서부터 관계는 깊어진다. 안타깝게도 아화는 처참하게 기워진 삶을 수십 년 간 살아왔다. 그는 처음부터 연인과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었고, 아오와의 약속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늘 불안했다. 플라이를 위한 약속은 지켰지만 저녁까지 오겠다고 한 아오와의 약속은 마지막 배편을 타고서야 억지로 맞출 수 있었다. 그마저도 금방 돌아오겠다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약속은 영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지나온 삶이라는 육중한 궤도 안에서 약속은 얼마나 미약하고 위태로운가. 아화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에 무너졌고, 그들의 관계는 열렬한 그리움과 약속을 품은 채로 흩어져버렸다.


현실에도 누아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약속받지 못하고 기다림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있다. 더 거칠거나 순한 차이가 있을 뿐, 내일의 약속이 바람만큼 가볍지는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름의 비극을 공유하고,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서로를 떠나고 남겨진다. 자신의 아픈 과거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누군가와의 관계에 간섭한다는 사실은 순응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억울하다. 동시에 상대의 입장에서도, 그 사람의 비극을 안아주겠다는 약속을 무색하게 만드는 삶이 사무치도록 야속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휘몰아치는 인생을 견뎌내며 끊임없이 약속한다. 기다리겠노라고, 돌아오겠노라고.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사랑에 무너진 아화와 아오만큼, 우리는 생각보다 관계에 목말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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