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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꼬꼬 Feb 09. 2020

<지 아이 제인, 1997>

영화로 삶 말하기 8

쇄도하는 창 밖의 사상으로부터 분리된 내부적 결속.



나는 초등부 유도선수였다. 연습 때는 몸무게가 내 두 배 가까이 나가는 상대도 능숙하게 제압했고, 시 대회에서는 전년도 전국체전 입상자까지 누르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제법 많은 중학 유도부에서 입학 권유를 받았지만 응하지는 않았다. 그 길을 선택했을지라도 특별한 성취를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운동으로 성공하기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길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선택의 문제가 어찌 되었든, 그렇게 나는 그 이후로도 남자들 사이에서 힘이 꽤 센 사람으로 살았다.


삼 년 전쯤 건강관리를 목적으로 수유의 한 유도관에 두 달 정도 다니게 됐다. 다시 도복을 입는 건 거의 십오 년 만이었지만, 나는 유단자이자 왕년의 유망주였다. 사나흘이면 다시 감을 찾게 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자만인 것은 이 상당히 안일한 오만을 꺾었던 사람이 겨우 중학생이었기 때문이다. 키는 150 중반에 몸무게는 45킬로그램도 안되어 보이는 작은 '소녀'는 나를 가차 없이 업어치고 빈틈없는 조르기까지 선물했다. 3초 정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얌전히 누워있는 허약한 아저씨가 있더라.


소위 쪽팔릴 일임에도 내가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째는 중학 유도부의 운동량을 익히 알고 있음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 어린 선수의 눈빛을 이미 봤기 때문이다. 바닥에 던져지기 직전, 나는 뜻밖의 거센 공격에 무심결로 저항하다가 상대의 얼굴을 살짝 치고 말았다. 코치님의 질타는 당연히 내가 아닌 어린 선수에게로 향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고전하고 부상을 허용하는 일은 프로의 잘못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 친구는 나를 악에 받친 눈빛으로 노려봤고, '고작 이 정도인 성인 남성'을 간단히 제압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진하게 녹아있었다. 아, 도저히 이런 강자는 이길 수가 없다.


이 장면을 대중이 봤다면, 상당한 설전이 오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같은 신체조건이면 남자가 근육량이 더 많기 때문에 유리하다.

-봐라, 여자도 남자를 이길 수 있잖아?

-상대는 프로잖아. 일반인 남녀 열명씩 뽑아서 붙이면 남자가 십중팔구 이길 거다.

-여자는 어떤 면은 약하지만 다른 면은 강하니까 충분히 남자들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웃긴 일이다. 노력하고 부상당하고 투쟁하고 쟁취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이 더 유난스럽다. 벽을 부수고 나아간 영웅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온갖 십자가를 지운다. 조금 강인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은 국가대표로서, 인종의 자존심으로서, 정치공작의 선전물로써, 사상의 증거로서, 성별 논쟁의 통계자료로서 갖은 꼬리표를 달고 싸우는 대리인으로 투기장에 들어선다. 가슴팍에 로고를 새기는 후원기업들은 금전적 지원이라도 해주지만, 심판자들은 바람만 높다. 승리와 패배까지 이용해먹고는 쓰면 뱉을 뿐이다.


네이비실 훈련에 임한 오닐(데미무어 분)의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상을 내세운 정치생명의 연장, 군의 명예와 안위, 혹은 부부관계의 일원으로서 이룩할 생활 따위로 한 인간이 넘어서고자 하는 역경을 잠식해 먹었다. 각 군의 엘리트들을 추려냈어도 수료율이 60%가 안 되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특수부대의 훈련에 여군이 지원했다. 소란스러울 필요가 없다. 그녀가 집중할 것은 그녀 자신의 싸움이면 족하고, 어떤 짐을 지고 싸울지 역시 그녀가 결정한다.    


정작 그녀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조롱하고 멸시했던 동료들이었다. 이들은 여성의 신체적, 정신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다. 그럼에도,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남자가 일궈내 왔던 명예와 자존심에 점철되어 살아온 마초들이 결국 그녀를 존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오닐의 훈련 성적이 남자들보다 뛰어나서?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도 포기하는 훈련 과정을 수료해내서? 그저 그녀가 흘린 땀과 피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식량을 나누고 흙바닥에 얼굴이 쓸리고 치욕적인 고문 훈련과 생사가 오가는 실전을 함께 지나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구경하며 짐을 지운 사람들은 평생이 가도 모를 인간으로서의 발악에서 내부적 결속이 다져진다.


결속의 전제는 시점이 아닌 기간에 있다. 수치화된 신체능력, 학력, 인종, 계급, 소득, 국가, 사상 등 한 시점의 조건은 관계의 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결속에 닿게 하진 못한다. 감정의 공유, 목표를 향한 집념, 극한 상황에서의 가치관, 능력 발현의 과정과 동료를 수용하는 방식을 위시한 연속적인 고락은 기간을 두고 겪어야만 알게 되는 결속의 근거다. 창가에 돌질하는 꼬마들처럼 사상을 뭉쳐 던지는 협잡꾼들은 불가항력을 넘어 인간을 엮어가는 악에 받친 눈빛을 영원히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결속으로 인해, 동료를 선택할 기회가 집단 내 다수의 일시적인 의견합으로 결정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특수부대의 최종 수료 인원의 일정 비율을 여성으로 정해두는 것만큼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훈련에 도전할 기회를 박탈하는 불합리는 허락되어선 안된다. 결속은 특정 시점의 조건을 바탕으로 집단이 결정하는 바가 아닌, 구성원들이 지속하는 '기간'자체가 결정한다. 몇 가지 피상적인 조건들이 그 결정에 관여할 수는 없다.


누군가 승리를 기대하기 힘든 싸움에 나설 때, 그 예상되는 패인이 기인하는 바가 불공정한 기회든 능력적 결핍이든 자격의 모호함이든, 이것은 결코 개인의 싸움이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어떤 사상을 짊어지고, 어떤 가치관으로 싸워나가고 어떤 형태의 결속을 이뤄낼지 선택하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다. 굳이 그 싸움에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고 싶은가? 좌절의 순간에도 함께하는 방법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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