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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꼬꼬 Feb 05. 2020

<아비정전, 1990>

영화로 삶 말하기 7

삶의 결여를 향해 힘껏 저지르는 무례.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분명 내게 어릴 때 많이 연애하라고 조언했다. 열렬한 박동과 결별의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상대를 선택하는 안목을 기르고, 타인과 감정을 나누는 삶의 성숙은 사랑에서 얻어진다고 했다. 그토록 진지하게 사랑을 설파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깊은 바를 이룩했는지는 몰라도,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것이 청춘에게 다가오는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이 주는 결실과는 무관하게, 숨 막히는 사랑에 저리는 많은 이들은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함에 여념 없다.  


나도 연애를 몇 번 해봤다. 밤새 속삭이던 달콤한 구애가 하루아침만에 차가운 선고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수백 번 가슴을 찢기다가도 한 번 어루만짐에 뜨겁게 아문다는 것을 나도 조금은 안다. 세상을 다 줄 듯한 장담으로도 사소한 양보마저 약속하지 못하고, 간절할수록 모질게 굴면서 동시에 간절할수록 연약해지는 모순적인 감정의 궤도를 조금은 재어볼 수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제 앞에서는 이해를 초월한 듯이 끌어안다가도, 하찮은 잘못에는 종말처럼 분노하는 혼란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사랑을 해낸다.


때로는 후회하며 아파하는 순간도 온다. 시들어가는 당신의 눈빛을 지켜보는 일, 지금 기다리는 것이 그의 연락인지 이별인지를 고민하며 시간을 지새우는 일,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진심과 그 조각을 주워 모으는 초라함. 지독한 쓰라림에 몸부림치면서도 정작 내가 그에게 입힌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해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기억을 함께 묻고 홀로 추억을 파내는 비참한 역경까지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사랑만큼 아픈 병이 드물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순수하게 사랑하는 법을 잊어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은 거짓이라고 답하겠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거나 지난 기억들이 오늘처럼 생생한 탓이다.


아비는 정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애태우며 빠졌던 사랑의 존재가 굳이 기억해내야 떠오르는 기억이라면 이미 답은 정해졌다. 월 오십 불의 대가로 버려진 어린 시절부터 친모에게 뒷모습만을 보여주며 돌아 나오는 순간까지 그의 삶에는 사랑이 결여되었다. 무언가가 빠진 삶이라면 거기에 맞서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어떻게든 채워보고자 갈망하거나 공백에 시선 한번 두지 않고 나아가거나, 혹은 아비처럼 그 비어버린 허무를 온 힘을 다해 증오한다.


여러 여자를 가볍게 만나고 버려온 아비의 행위는 삶의 결여된 부분을 향해 외치는 선포처럼 무례하고 비장하다. 그의 편력은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함도, 보다 많은 사랑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에게 결여된 것이라면 타인에게도 무의미하길 바라는 이기심이 그를 냉랭히 얼리지 않았을까. 멋대로 마음을 열고 들어가서는 그 속을 난장으로 헤집고, 문도 제대로 닫지 않은 채 떠나버리는 무례함은 마치 자신의 삶과 상대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나는 너에게 받아간 사랑이 없다. 애초에 너도 가진 사랑이 없었기에.'


얼마 전 서른을 넘겼다. 많은 이들이 조건과 감정을 밀고 당기며 저물기 시작하는 삼십 대의 사랑을 한탄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사랑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해보았기 때문에, 그 시작부터 끝에 얼마나 많은 아픔이 쏟아질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무뎌지는 듯한 감정이 두렵기 때문에 힘껏 변명한다. 아비의 무례는 삶의 결여를 향했지만, 우리는 이미 사랑을 가져왔음에도 서로에게 무자비하다. 사랑을 잊은 척하며 성숙을 지어내는 나는, 너는, 그리고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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