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삶 말하기 6
시대의 사선에서 측정한 진실의 무게.
죽음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산다. 영원히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믿었던 사람은 없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죽음은 점처럼 찍히고, 그 점이 의미하는 삶이란 맥락의 단절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죽음은 너머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렵다.
조금 더 정확한 말을 하자면, 죽음보다 죽음에 닿기까지의 길이 고통스럽다. 죽음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부터 사람은 생의 관성을 원망한다. 삶의 내리막, 사선에서는 간절히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드라마 체르노빌은, 여러 세대에 걸쳐 처참하게 늘어진 사선을 걷는 사람들과 그들이 짊어진 대가에 관한 회고록이자 계시록이다.
체르노빌의 죽음은 복잡하고, 기만적이고, 추잡하게 끈질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몸을 통과하면 세포가 회복하지 못해 무너져 내리고, 잠복기에는 다 나은 듯했다가 한 순간에 몸이 썩어 들어가며 지옥 같은 고통으로 끝나든지 운이 좋으면 수십 년간 병이 녹처럼 슬어 처절하게 죽는다더라. 나라면, 이 삶에 녹아 눌어붙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조차 없다. 물도 불도 총알도 균도 아닌 것이 분명하게 몸을 죽여간다. 미지의 죽음이 명확한 고통을 동반하는 순간을 나라면 감당할 수 없다. 어떤 죄를 지어야 이다지도 가혹한 벌을 받을까.
드라마를 봤다면 이 저주는 불공정한 형벌임을 안다. 죄는 소수가 지었으나, 수십만의 사람이 삼십 년이 넘도록 대가를 대납하고 있다. 연료동력부 장관 셰르비나는 수조탱크로 보낼 지원자를 뽑는 자리에서 모든 세대는 각자 시대의 짐을 진 채 살아간다고 말했다. 인상적인 연설이었지만, 그의 이상적인 단념은 무고한 사람들이 가장 비참한 몫을 떠안게 되는 의문을 해소해내지 못한다.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업이라는 순응으로는 이 저열한 주종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체르노빌에서 삶을 희생한, 육중한 시대의 짐을 기꺼이 짊어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쪽은 레가소프와 호뮤크가 대표하는 진실을 갈망하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실의 해석과 그 결과물이 체제의 온존에 미치는 영향에 집착하는 소련의 수뇌부에 의연히 맞섰다. 과학자들이 가진 세상을 바꾸는 힘은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 거짓을 용납하지 못하는 진리를 향한 순수 이리라.
다른 한쪽은,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단념과 순응으로 각자의 몫을 맡은 사람들이다. 셰르비나는 5년에 못 미치는 수명을 예고받고도 지옥에 남았다. 수조탱크 밸브를 열었던 기술자들과 제대로 된 장비도, 보상의 약속도 없이 명백한 사선으로 들어선 군인들과 광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단 한 뼘 가늠할 수도 없다. 진실, 거짓, 은폐, 폭로, 체르노빌과 크렘린 궁 사이의 투쟁을 초월하여 대상 없이 할당된 몫을 수행하는 이들은 무너진 공산주의의 실낱같은 이상을 상징한다.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죄와 대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쳤다. 죽음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영화와 실제 사건에서 이미 숱하게 조명되어 왔다. 체르노빌의 의인들뿐만 아니라 라이언일병구하기의 밀러 대위, 분노의 역류의 소방관 스티븐, 그리고 실제 사건인 911테러나 지금도 진행형인 호주 산불에 맞서 온 영웅들의 희생정신은 얼마나 숭고한가. 그들은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위해 자신의 지분이 없는 죽음을 말없이 지불했다. 우리는 고귀한 희생을 찬양하는 만큼, 지켜진 가치를 보존해 왔을까.
체르노빌은 회고록이자 계시록이다. 체르노빌의 희생자들이 짐을 떠맡았을 때, 시대의 사상과 양심은 그들에게 질문을 건넸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답했다. 모스크바 6병원에서 죽어간 아키모프와 레오니드는 최후까지 절규했고, 누군가는 삶과 진실을 바꿨으며 누군가는 죽음으로 뛰어들었다. 후에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몫이 전해진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현실은 드라마보다 참혹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생각보다 어리석고, 위태롭고, 비겁할 것이다. 아, 이미 한번 침묵했는가. 그렇다면 침묵의 대가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