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꼬꼬 Jan 16. 2020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영화로 삶 말하기 4

무너져가는 낭만에 대하여.




길과 거리는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는 통로와 그 자체로 목적지가 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한다. 사막은 길이자 거리로서, 모든 점이 교차하는 면이자 각각의 생이 횡단하는 운명의 장이다. 그곳에는 장대한 희망, 고결한 희생, 분노와 야만, 자유와 희망이 난잡하게 얽혀있다. 내딛음으로 시작하고 무너짐으로 끝나는 삶에서, 우리는 시종 사막을 걷는다.

로렌스는 사막에서의 첫 걸음을 밟는 순간에 정해진 길이 없고 닿는 모든 곳이 목표가 되는 광활한 백지가 열렸다고 여겼다. 예상보다 가뿐한 여정의 초입에서 그는 신기루를, 이대로라면 이룰 수 있겠다 싶은 내일을 보았을 것이다. 유목민족의 계몽, 중동 전역의 독립, 더 나은 체계와 문화를 선사하는 선지자로서 걷는 길에 닿을 듯 했다. 철학과 의지와 열정은 넓은 사막에서 옳은 방향을 찾아 줄 나침반이 되리라 믿었다. 꿈이 원대한 젊은 장교는 걷는 대로 길이 되는 사막을 사랑했다.

그러나 왕자의 말처럼 정작 아랍인은 사막보다 물과 나무를 원했다. 사막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만이 그 황폐함을 사랑한다. 분노와 잔혹, 불신과 오해, 그리고 약간의 자유와 희망이 뒤섞인 광활함의 복판에서 그의 걸음은 점점 파묻혀 갔다. 개척자가 되고자 했던 로렌스는 사막에 만연한 야만이 자신 안에도 존재함을 눈치 챘다. 독립과 자유보다 전리품을 바라는 베두인 부족과 분노와 혼돈에 사로잡힌 자신, 이들을 꼭두각시로 제국의 팽창을 획책하는 권력가들은 모두 다를 것 없는 사막의 방랑자일 뿐이었다. 그는 환멸을 느꼈다. 사막의, 운명의 생태와 관습에 대한 더 깊은 이해, 그것이 곧 환멸이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하는 행위는 운명에게만 허락된 권리다. 이상주의자는 이를 의무로 착각하고 무겁게 걸음을 딛는다. 모든 길과 거리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이, 사막에도 결말은 있다. 종장은 회한으로 귀결한다. 젊은 비관론자는 있어도 늙은 이상론자는 없음이 세상의 섭리임을 알아가는 것이 사막의 여정이다. 늙은이들은 몽상가가 후회 속에서 어떻게 무너져가는지 충분히 보아왔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뒤를 밟는 자만이 승리한다.



이전 03화 <러브 레터, 199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