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삶 말하기 3
엇갈려야만 운명이 된다. 눈밭에서 당신을 찾는 이정표, 너의 이름.
온전한 기억과 완전한 기억이 있다. 온전한 기억은 쪼개어진 단편들로 수많은 인연들이 각각의 형태와 방식으로 간직한다. 누군가는 자신만의 온전한 기억을 갖고 삶으로써, 누군가는 그 조각들을 완전하게 맞춰나감으로써 깊어지는 사랑을 체감한다.
친구의 연인과 만나는 자리가 생기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 사람의 지난 시절은 어땠나요?
정말 궁금해서인지 아니면 낯선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내뱉는 비장의 카드인지는 늘 다르겠지만, 과거를 향한 질문은 인연을 검증하는 하나의 의식 인양 치러진다. 그 순간에는 불안함과 애처로움, 진실과 도움을 원하는 눈빛들이 끊임없이 맞물린다.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가끔씩 즐길 수 있는 권력행사임과 동시에 껄끄러운 고역이다.
질문의 의도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은 나의 연인이 내게로 걸어온 길을 알고자 한다. 눈앞의 이 사람이 내 시야 밖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던 시절에 대한 역사, 헤쳐온 눈보라와 이따금 지나친 행인과 풍경, 방향의 전환과 걸음의 속도 같은 상세한 삶의 흔적들. 또는 아직 나를 눈치채기 전에 좇아왔던 사람들에 대하여.
온전한 기억들을 끼워 맞춘 완전한 기억은 높은 확률로 실망스럽다. 실망할 일이 아닌데도 실망하는 일 또한 하나의 사랑이다. 하지만 드넓은 눈밭에서 내게로 오는 정해진 길 따윈 있을 수 없다. 길은 목적지가 있어야 성립하고 눈밭에서는 만나고 나서야 길이 생긴다. 그 후에는 둘 중 하나다. 함께 머무르든지, 길을 더 걸어가든지.
사람들은 헤어진 연인과 스쳐간 인연들에 대해 엇갈려서 안타깝다고 말한다. 만남의 각도가 조금만 덜 기울어졌다면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어떻게든 엇갈렸기 때문에 교차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운명이다. 운명이 엇갈린 덕분에 만나게 됐으며 어느 한쪽이, 혹은 모두가 각자의 길을 더 걷고자 했기 때문에 이별한 것이다. 삶의 눈밭에서는 만남까지가 길이고 머무름이 사랑이다.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그들이 어리고 어설퍼서가 아니다. 아직 가야 할 걸음이 먼 탓이다.
그리고 이름, 기억의 눈밭에서는 길을 찾는 이정표가 사람의 이름이다. 시인 김춘수도 사람을 이어주는 이름을 그렇게도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셀 수 없이 엇갈리는데, 셀 수 없는 이유로 그저 지나쳐버린다. 그리고 문득 들리는 노랫말, 버스가 끊겨 총총 걸어가는 거리, 책장을 정리할 때 슬쩍 떨어지는 사진과 편지에서 엇갈렸던 지난 운명을 느낀다. 그때 떠오르는 것이 그 사람의 이름, 눈밭에 함께 서있던 순간 내가 불렀던 그 이름이다.
이츠키와 이츠키는 한 때 어느 목적지에서 접했지만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쳐버렸다. 그리고 운명은 다시 한번 엇갈려 히로코를 만나고, 다 잊었던 기억을 되짚어 평생 묻힐 뻔 한 사랑을 찾게 됐다. 둘의 운명은 이름에서 이름까지였다. 인연의 교차는 히로코가 졸업앨범에서 처음 찾았던 이름부터 시작하고 도서대출카드의 이름으로 끝났다. 기억의 색인, 매 순간 다시 덮이는 눈길을 거슬러 갈 이정표.
누군가 내게 오늘부터 특별한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한다면, 해돋이나 땅거미로 불러달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말하게 되든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든 간에, 나는 약간의 어색함과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리 부르겠다. 내 기억 속에 유일한 단어로 존재하고자 한다면 나는 앞으로 그 누군가를 기억해낼 때 조금 더 수고해보겠다. 넓은 눈밭에서 그 사람과 함께 머물렀던 장면의 이정표를 떠올리기 위해 조금 더 애써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