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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꼬꼬 Jan 15. 2020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

영화로 삶 말하기 1


비일상, 갑작스러움, 스치는 사랑, 지나쳐가는 것들을 통해서만 자유로운 누군가의 삶.



젊은 시절의 엄마는 예뻤다. 맥 라이언이나 제니퍼 그레이처럼 잔뜩 볶은 머리, 청바지에 통이 크고 깃이 넓은 셔츠, 어깨뽕이 많이 들어간 청자켓을 입은 엄마의 젊은 시절은 80년대 무비스타 못지않았다.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엄마를 따라다니던 남자들을 셀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말을 믿는다.

엄마는 나에 관한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다. 했던 말을 다시 하면 신경질을 내고, 브로콜리나 가지볶음은 입에도 대지 않고, 화나거나 힘들 때 말이 없어지는 예민한 아들내미를 세상에서 제일 잘 안다. 여자 친구를 사귀면 말하지 않아도 일주일이 안돼서 알아차렸고, 친구들도 모르는 이별까지 엄마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의 많은 자식들처럼 못난 아들놈은, 30년을 안겨 살아왔으면서도 엄마의 삶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손수건으로 코를 닦고 다니던 어린 시절과 카세트테이프에 비지스나 비틀즈, 아바를 녹음하던 사춘기의 엄마를 나는 영영 만나지 못한다. 사랑을 시작할 때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가슴 졸이던 기다림과 갈등을 지나 이별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버티며 이겨냈는지를 나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괜히 서럽다.

엄마가 먼 사람인 듯 느껴져 서러운데, 엄마가 나를 보던 표정은 다 기억난다는 것이 날 더 서럽게 한다. 다섯 살 무렵, 열이 40도가 넘게 올랐던 밤에 엄마는 밤새도록 내 열을 재고 물수건을 갈아줬다. 천장 형광등 빛이 가끔 가려질 때마다 날 들여다보는 엄마의 혼이 나간 표정을 기억한다. 동생이 옆집 자전거 체인에 손가락이 끼었을 때 달려오며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수능날 아침에도,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입대 직전에도, 면접에 떨어져 힘없이 들어왔던 어느 밤에도 엄마가 나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나는 다 안다. 나는 엄마 눈 안에서 30년을 살았고, 엄마는 자라 가는 내게서 인생을 봐왔다.

러브어페어를 보며 불륜은 비열하고 치졸하다고 생각했다. 더러움을 감추려 애틋한 척하고, 배덕에서 아름다움을 캐내는 착각이라고 여겼다.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난 후에는, 그 미움 너머에 내가 알 수 없었던 흘러가버린 삶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따뜻하고 무겁고 아픈 기억을 감히 내 멋대로 단정해 버리는 일이 옳은 것일까. 나는 그렇게 가까웠던 엄마의 인생조차 내가 봐왔던 일부만으로 판단했는데, 또다시 한 사람의 사연을 저울질하는 오만을 저지를 수 있을까.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비운 나흘간 자신만의 삶을 살았다. 사랑에 목매고 불타고 질책하고 슬퍼하다가 떠나보내는, 떠나는 일보다 보내는 일이 고통스러움을 아는 작은 인간으로서. 그 하소연과 눈물에 엄마가 나를 위해 숱하게 떠나보내고 놓쳐왔던 엄마의 삶도 약간 담겨있지 않을까 했다. 나의 엄마가 아닌 삶의 어떤 순간에 남겨진 사람으로서의 엄마를, 적어도 나만큼은 이해해보고 싶었다. 엄마가 나에게 그래 왔듯이. 

 여전히 배신은 잔인하고 기만은 치가 떨린다. 그럼에도,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단 하나의 사랑을 바라보며 움켜쥔 문고리를 밀지 못한 그녀에게, 나는 차마 분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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