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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꼬꼬 Jan 15. 2020

<인사이드 르윈, 2013>

영화로 삶 말하기 2

아래로 정렬된 음계들이 연주하는 침몰의 일상.




주말의 늦잠 덕에 잠들기 힘든 월요일 새벽처럼, 매년 반복되는 지독한 여정의 시작도 다가오고야 말았다. 걱정은 매년 커지는데 올해는 서른이란 덤까지 얻었다. 아, 만 나이로는, 따위의 무의미한 절규는 먹히지 않을 것임을 안다. 군것질이나 자는 시간을 지켜야 했던 어린 시절에는 과자 한 봉지, 늦잠 10분이 그리 야속했다. 두발 단속을 당하던 학창 시절에는 세상이 유독 학생을 억압하는 줄 알았다. 조금 더 살아보니 사회는 청년에게 유난히 각박하다. 결국 돌고 돌아 삶은 오늘의 나에게만 늘 어렵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르윈 데이비스는 아쉬운 재능에 조금 비열하게 처신하고 뭐든 잘 풀리지 않는 만년 예술가 지망생이다. 영화 내내 단 하나의 극적인 장치마저 없이 처절한 그의 삶은 철저하게 건조하다. 이 위태로운 뮤지션은 푸석푸석하고 번잡하고 치졸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침몰해간다. 아니, 그는 이미 가라앉아 턱 끝만 수면 위로 내놓은 채 허우적대며 물살을 가르고 있다. 나는 르윈이 한순간이라도 기적적인 행복을 느끼길 간절히 원했다. 그가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내 목구멍으로 흙탕물이 넘어오는 듯했다. 솔직하게는, 그를 위한 응원이 아니라 엉킨 나의 인생을 향한 기도였다.

시대가 인정하는, 하다못해 충분히 성공한 예술가들의 내면은 잘 모르겠다. 그들이 한계를 부수고 닿은 저 높은 경지 혹은 깊고 유구한 의미에 대하여는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작은 균열 너머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염없는 반쪽짜리 예술가들의 안쪽은 어렴풋이 느껴질 것도 같다. 그 풀 수 없는 응어리에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잡한 믿음과 심미적 가치를 탐구한다는 조금 허황된 자부심과 더 나은 재능에 대한 시기, 일 인분의 밥벌이를 인간의 자격으로 부여하는 시대에 대한 분노가 박혀있다. 이 복잡한 신경과민은 점차 진행되어 신앙이 된다. 르윈은 ‘거기서 거기인’ 포크송을, 나는 있어 보이는 글 몇 줄을 종교로 삼은 신실한 신자다.

르윈은 마지막으로 꿈을 좇아 시카고의 프로듀서를 찾고 퇴짜를 맞는다. 그는 인정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멸시하던 시체처럼 시간을 죽이는 뱃일을 구하러 조합을 찾았다. 꼬이는 인생답게 어업조합의 농간과 상술이 그의 승선을 막은 것은 운명의 장난인 듯 보였다. 그러나 르윈은 역시 음악을 포기하겠다는 그의 결심이 그토록 단호하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 삶은 장난치는 법을 모르기에 배에 오르지 않은 것은 오직 그의 선택이다. 생계를 따지기 어려울수록, 아래로 정렬된 예술가들의 신앙은 모호한 형태로 굳어진다.

타인의 입장에서, 아쉬운 예술가들은 현실과 예술 어느 쪽에 포함되든 별 다를 바 없다. 한두 번 들을 만한 음악, 두어 줄 읽을 만한 글, 잠깐 생각해볼 만한 그림은 생활비와 저울질했을 때 눈금을 정하기 어려운 탓이다. 특히, 이따금씩 눈에 띌 만한 창작을 해내는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있어 삶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은 시시각각 요동친다. 그들이 끝에 어떤 선택을 하든 고려하는 것은 한 가지다. 가라앉을 자리. 그들은, 또는 우리는 어차피 무너질 것이라면 최후에 쓰러지고자 하는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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