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화병의 시작
잠옷만 입고 부스스한 얼굴로 이불속에 있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문을 열고 밥을 먹으라고 한다.
깜짝 놀랐다.
'저 사람 누군데 함부로 방문을 열고 밥을 먹으라는 거야 데체!'
.
.
나는 다음날..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로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뀐 줄 몰랐다. 우두커니 허공을 보고 서있다가 뒤늦게 건넜다.
수업 중 오른손이 계속 떨려와서 펜으로 아이들에게 확인 사인을 해줄 수 없었다. 폭발적인 화를 꾹 참았더니 충격이 손으로 전해졌음을 의사나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도 모든 걸 멈추고 허공만 바라봤다. 그러고 있는지도 몰랐다. 강의실을 둘러보시던 부원장님이 다가왔다. 내 모습에서 본인의 과거를 보셨는지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마치 무슨 일인지 아는 것 같았다. 자신도 이전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며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들어보니 대기업에서 돈과 관련한 큰 일을 겪고 소송도 하고 정말 많이 힘들어하다가 지인을 통해 학원가로 오셨다고. 과거를 상기하며 조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부원장님은 남자분이신데 통찰력이 있고 배려심이 넘치셨고 그런 다정하고 차분한 이미지가 어딘지 학원과는 조금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 학원에 들어갔을 때 부원장님은 나를 불러놓고 '왜 이제 나타나셨나요'라는 내겐 이상하고 의아한 말을 흘리셨다. 차차 주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혼 생각이 없으셨는데 부모님이 원하셔서 선을 보고 결혼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형과 가까운 나를 그 후에 발견하셨다는 거다. 물론 미혼이었다 한들 나는 관심이 없었겠지만. 그리고 그분은 얼마 후 쌍둥이 딸들을 얻으셨다. 왠지 부원장님 인생이 원하는 대로 안되고 꼬여만 가는 듯 보였다. 조금 우울하고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그분 덕분에 심리적으로 조금 버틸 수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언제나 나를 꿰뚫어 보시고 서툰 일들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다른 강사님들, 학부모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방패막이이자 중재자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점에 그분이 옆에 계셨다는 게 참 묘하다. 왜냐하면 후에 그 학원을 그만두며 다정했던 그분이 마지막에 던진 한마디 역시 지금의 나를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귀인이었을까?..
(엄마가 허락 없이 내 돈을 다 써버린 사건은 내 홀로서기의 시작이었고, 부원장님이 마지막으로 내게 말씀하신 한마디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오기가 됐다.)
힘든 며칠이 지난 후 내 속의 뜨거운 불은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그리고 느꼈다.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구나.'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