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빠
고등학교 때인가 식사하다가 아빠가 그런 말을 했다.
옛날에 엄마가 꼭 당신처럼 그랬다고.
항상 칭찬 한마디 없고 밥 먹는데 나무라기만 하고 당신 꼭 그때 엄마 같다고.
아빠는 할머니의 그런 면이 싫었으면서 비슷한 면을 가진 엄마와 결혼했다. (반대로 엄마는 무시당하는 것, 존중받지 못하는 것을 싫어했음에도 자신의 미개함은 보지 못하고 종종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아빠와 결혼했다.)
엄마는 특히 식사시간에 앉으면 아빠 일 얘기를 시작하며 아빠의 문제에 대해 끄집어내서 밥맛이 뚝 떨어지게 했다. 인생을 그 보다 덜 산 나도 그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엄마가 이혼하자고 하면 아빠는 늘 그랬다.
"내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왜 이혼해?" ㅋㅋ
이혼에 대해 아빠가 가진 개념은 딱 거기까지였다.
매일 엄마가 나에게 와서 아빠욕을 해서 나는 진짜 아빠가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아빠야 말로 그런 엄마를 견뎌왔다. 젊을 적 주사가 심하고 한번 열받으면 욱해서 소리 지르지만 엄마를 때린 적은 없다.
나에게도 한번 걱정했답시고 쌍욕을 한 적은 있어도 딸이라고 절대 손지검 한번 없었다. 나 같으면 암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인데도 아빠는 엄마가 주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한 모욕을 견뎌왔다.
당연히 아빠도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아빠는 좀 못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쪼~다'라는 말을 하며 치명적으로 아내에게 생활비를 줘야 한다는 개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엄마는 미치고 환장하며 살아왔다.
생각보다 자주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빠가 엄마를 조금 더 존중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엄마가 아빠가 하는 일을 좀 더 칭찬해 주고 존경해 줬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빠가 하는 새로운 일에 대해 지원은 못해줄지언정 믿고 지지해 줬더라면?
길을 걸을 때 엄마 아빠가 언제나 손을 잡고 걸었다면 나는 지금 쯤 결혼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나에게 아빠욕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아빠의 관계는 더 좋았을까?
엄마가 너무 올곧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엄마가 언니만큼 좀 더 공부도 하고 학습적 지원도 받으며 살았다면?
한 번도 만나 뵙지 않은 외할아버지가 좀 더 길게 살아계셨다면 엄마는 지금 보다 행복했을까?
엄마는 자식들을 자신의 울타리로 모아 아빠를 소외시켰다. 당연히 아빠도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다.
용돈만 줄 뿐 학교도 잘 안 데려다주는 무심한 아빠가 미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왜 그랬는지 이해하려 한다.
아빠도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우리와 거리를 두었던 건 아닐까.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엄마가 그렇게 말해서 그렇게 되어버린 건지 진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엄마는 늘 아빠 주변에는 이혼한 사람들만 있고, 인복이 없다고 했다. 아빠의 삶이 온통 부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사업이 안될 때는 온 가족이 숨죽일 때도 있었다. 꼭 아빠가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아서였다... 집에 들어가면 꼭 안방 화장실을 슬며시 열어봤다. 혹시 목매달았을까 봐.. 코로나기간 아빠가 힘들어할 때도 마찬가지로 종종 화장실을 확인했다.
심리상담받을 때가 생각난다.
"이번엔 아버지 이야기를 해볼까요?"
"혼자 공부방을 운영해 보니까 혼자 사업하는 아빠가 좀 이해가 갔어요... "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아.. 참 외로웠겠다... 혼자서 참 외로웠겠다..."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