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의 시작은 두근두근 핑크빛이었지만...
VIP석. 금액을 보니 손이 떨렸다. 하지만 생일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몇 년 치 생일을 모아 한 번에 쓰는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해외여행도 가는데 뮤지컬 한 번쯤이야. 티켓팅이 개시되는 순간, 예전부터 수강신청으로 다져진 내 손가락이 바람 같이 결제와 예매를 한 번에 끝냈다. 그래, 드디어 난 그의 뮤지컬 예매에 성공했다.
몇 년간 계속 나의 ‘최애’였던 그는 가수만 아니라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했는데 그간의 배역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주인공을 딴 것이었다. 차근차근 메인 롤까지 올라온 그 사람이 기특했다. 팬이라면 그런 노력을 봐줘야지. 나도 뮤지컬 보러 갈 준비를 해야겠다.
덕질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검색해서 찾아보니 당시 아이돌 팬미팅 규범이 있었다. 다들 사진에 찍히니까 최대한 예쁘게 꾸미고 손톱 네일아트까지 받고 간다고. 왠지 최애를 만날 때 꾸미고 가고 싶은 마음이 이해됐다. 이건 뮤지컬이고 팬미팅은 아니지만 사소한 것 하나까지 챙기는 마음이라고 보여 나도 따르기로 했다. 네일숍에 가서 기본 손톱케어를 받고 연한 핑크색 자연스러운 네일을 받았다.
드디어 공연날, 하얀색 주름이 잡힌 원피스와 상큼한 메이크업에 귀걸이와 목걸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했다. 공연장에 들어가니 VIP석은 무대 정중앙 가까이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가서 앉아 주변을 보니 대부분 손 큰 중국팬이었다. 설렘과 긴장이 섞여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 앉아있어도 되는 걸까. 그래도 그가 뮤지컬 주인공이 되어 멋진 무대를 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앞이었다. 사실 당시에 나는 공황장애가 있을 때라서 눈에 띄는 곳에는 절대 있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R석 정도로 할걸. 설렘과 기대, 공포가 뒤섞여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후회도 됐다. 하지만 이미 예매했잖아. 그냥 여기 앉자.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빠르고 큼지막한 심장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모처럼 왔는데 즐겁게 보고 싶었다. 그러려고 왔으니까. 혹시 몰라서 약국에서 사온 청심환을 힘 빠진 손으로 겨우 뜯어 조심스럽게 살살 씹었다. 다행이다, 맛이 그리 쓰지 않아서.
뮤지컬은 성공적이었다. 전반적인 뮤지컬 넘버도 좋았고 그의 노래도 감미로웠다. 주인공이 그네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바로 공연장을 나왔다. 조금 걸어가니 버스 정류장 옆면에 뮤지컬 광고가 붙어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슬픔을 다룬 이야기, 베르테르였다. 내가 방금 보고 나온 뮤지컬. 무언가 말할 수 없이 처연한 기분으로 바라본 그날의 하늘은 아아, 왠지 슬프도록 맑은 푸른색이었다.
* 이 글은 기존에 써놓은 글을 연희창작문학촌에서 수정 업데이트하여 발행했습니다. 작가들에게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시는 연희창작문학촌 및 서울문화재단 관계자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주로 시와 동시를 쓰지만, 사이드 프로젝트로 브런치에서 여행기와 에세이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