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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심산책자 Jan 04. 2023

언니의 도시락

도시락에 관한 추억

매월 마지막주 주말은 엄마가 엄마의 언니에게 다니러 가는 날이다. 이모가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로 계속되고 있는 엄마만의 루틴이다.


맛있게 지은 찰밥 한 통.

이모가 좋아하는 소고기 뭇국.

그리고 씹기 좋은 재료로 만든 각종 반찬들.

카트에 한가득 담긴 것들을 보고 있자니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17살 되던 해부터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까지 하루에 버스가 단 6대 다니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는데, 그 당시에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던 학생들은 통과의례처럼 시단 위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나의 경우 다행히도 6살 터울의 대학 졸업반 언니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살 집을 골랐는데,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언니가 다니는 대학교에서는 1시간 남짓 걸리는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빠듯한 예산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단칸방 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고른 방은 2층짜리 주택의 1층 뒤쪽 코너에 위치해 있었다.


2층에는 주인집이 살았고, 1층에서는 오락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 방은 오락실 한쪽 귀퉁이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방에 있으면 오락실의 주 고객인 코흘리개 초등학생부터 제법 어른 흉내를 내던 중고등학생들이 몰려다니는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좁은 방에는 그 보다 더 좁은 부엌이 딸려 있었는데, 말이 부엌이지 구석에 달랑 가스레인지 하나와 한 쪽짜리 허름한 싱크대가 전부인 공간이었다.  


언니는 매일 그 작은 부엌에서 도시락을 쌌다. 23살, 한참 학업과 공무원 시험공부를 병행해야 했던 공시생(공무원 준비생) 언니에게 혹이 하나 생긴 거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저녁 늦은 시간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두 개의 도시락이 필요했다.


늦잠이 많았던 언니가 선택한 자구책이 있었으니.

이른 아침이 아닌 매일 2교시가 끝날 즈음에 도시락을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언니는 매일 갓 지은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만나러 왔다. 처음엔 언니의 수고스러움은 뒷전, 매일 2교시가 끝나고 학교 뒷문으로 가서 도시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요즘처럼 전화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1~2분이라도 늦어진다 싶으면 입이 댓 발 나와서 투덜거리기 일쑤였지만, 도시락을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엔 왠지 모르게 기운이 났다. 나는 마치 전쟁터에 나간 장군이 넉넉한 군수품을 들고 오는 것처럼 도시락을 좌우로 당당하게 흔들며 교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1년 중에 딱 두 번은 늦잠 많은 언니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야 했다. 바로 봄소풍, 가을소풍인데 언니는 소풍날이면 전날 사온 김밥 재료들을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했다.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뜨고 나와보면, 마치 간 밤에 엄마가 다녀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재료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근데 문제는 언니가 김밥을 말면 항상 재료들이 귀퉁이에 쏠린다는 거였다.


“언니. 김밥을 이렇게 귀퉁이에 붙여 놓으면 어떡해?”

“하하하. 아무리 말아도 그게 잘 안되네. 왜 이게 중앙으로 안 가고 옆사구댕이에 붙는다니? 하하하”


언니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웃어젖혔다. 이때가 바로 내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언니가 준비한 재료를 김 위에 적당히 깔고 돌돌 말아서 단번에 김밥 말기에 성공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중앙 배치의 어여쁜 김밥을 보며 의기양양해하곤 했다.


그 후 소풍날이면 언니와 내가 협동해서 맛있고 보기에도 좋은 예쁜 김밥을 싸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둘은 참 괜찮은 룸메이트이자 콤비가 되어갔다.


언젠가 언니는 딸아이를 부를 때, 자꾸 내 이름을 부른다고 말하곤 했다. 언니의 기억 속에 아이였던 내 모습이 얼마나 깊숙이 박혀 있는 걸까. 언니는 입에 붙을 정도로 습관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내 이름을 불렀을 것이었다. 그래서 조카에게서 그 옛날 익숙한 내 이름을 찾아 부르는 것이 아닐지.


이제야 그때 내가 의지하기만 했던, 그래서 정말 어른인 줄로만 알았던 언니 대신에 23살 아직은 혼자만으로도 버거웠을 언니가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동생 먹일 도시락을 싸는 일은 어쩌면 언니에게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단 한번 귀찮아하지 않고, 단 한번 투덜대지 않고 어른의 일을 했던 그 시절 언니.


우리는 이제 농담처럼 노년의 모습을 상상하며 며칠에 한 번씩 다니러 올 거냐고 묻는다. 학창 시절 언니들에게 받은 걸 생각하면 나도 엄마처럼 부지런히 음식을 싸 날라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할 줄 아는 음식이 없다는 거다. 30년 후쯤 되면 배달음식도 진화해 있겠지. 어쩌면 로봇 셰프에게 음식 제조를 맡기는 게 익숙해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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