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내게서 찾아야 한다

정체성은 '나 자체'에서, 혹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정체성(正體性)은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국어사전)다. 이 글에서의 정체성은 구체적으로 '자아 정체성'을 의미한다. 즉, 나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의 존재 의의를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는지, 무엇으로 나타내는지 등을 뜻한다.


이것은 매우 본질적인 의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므로, 이것이 불확실할수록 인생이 어렵다. 확실하고 단순하게 스스로를 정의할수록 인생의 모든 경로에서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난관을 헤쳐나가기 쉽다.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과의 교류에서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일관적인 정의를, 그 답을 일찍 찾았을수록 삶이 주관 있고 뚝심 있게 흘러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체성을 내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직장이라든지, 직함, 직급, 자산, 주변의 인정 등에 자아 정체성을 의탁한다는 얘기다.


실제 이런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국내 스토커 사례 중에, 전여친과의 불화나 문제로 대학교 동아리 회장직에서 잘린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이에 앙심을 품고, 전여친의 집에 들어가 부모를 살해하고 전여친을 감금했다. 전문가들은 그 남자가 사회에서 '리더십이 있는 자'로 통했었고 <동아리 회장직>이 그의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봤다. 회장직에서 잘린 것이 살인 계획으로 이어질 정도로, 사회에서 리더로 부여된 직함에 본인 스스로가 거는 정체성의 무게가 남달랐다는 의미다.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0대 남성 B씨는 최근 직장을 나왔다. 그간 열심히 일했었다. 승진도 매번 동기들보다 앞섰던 그였다. 하지만 퇴사 후 그는 마음이 공허해졌다. 삶의 방향성을 잃었다.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했다. 이후 B씨는 꽤 많은 시간을 마음의 정처 없이 방황해야 했다. 본인 스스로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세월의 연속이었다. 이런 사례는 인생을 걸고 직장 안에서 일에 매진한 사람들이 실직 후 원인 모를 괴로움과 허무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나 자체 혹은 내 안에서 자아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외부에서만 자기를 규정했기에 빚어진 부작용이다. 내가 아닌, 외부 요소를 빌려 나를 규정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매우 위험한 심리다. 달리 말하면 그 외부 요소라는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잠시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재산 등은 모두 내 옆에 붙어있다가도 언제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 내가 가진 장점이나 나 자체에서 오롯이 나를 규정한 인간은 비교적 주변 변화에 덜 좌우된다. 정체성을 외부가 아닌, 내게서 찾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나'에 대한 공부가 돼 있다는 뜻이다. 정체성을 내게서 찾으려면 나란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스스로 성찰하고 내 단점과 장점을 헤아려보고 내 심리와 행위들의 기저에 깔린 본질을 탐구하고, 이런 모든 노력들이 결과적으로 자아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 나를 모르고는 내게서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


정체성이 확고한 인간일수록 나에 대해 더 많이 안다는 뜻이고, 그럴수록 내 가치와 품위를 느끼는 자존감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나에 대한 통찰을 지속하고 외부에서 겪은 여러 경험을 통해 더 내 존재를 느끼면 느낄수록, 내 한계와 그릇과 단점들을 알게 되기에 어쩌면 처음엔 좌절할지도 모른다.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을 거다. 하지만 여러 경험과 통찰과 성찰을 계속 이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누구나 단점이 있는 만큼, 장점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누구나 나처럼 완전히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은 존재들이란 '존재의 보편성'을 깨닫게 되는 거다. 누구나 특별히 위대하지도 하찮지도 않은 존재들이란 경험과 통찰을 통해 나 역시 그리 대단할 것도 못날 것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성도 바로잡히게 된다. 그러면 이후부턴 그러한 '기준'과 '답'과 '확신'으로, 자신의 삶을 마음껏 항해하면 된다. 나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으로 모든 인생의 고락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그 과정에서 때론 실패할 수도, 잠시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대단한 것도 아니고 못난 존재도 아니기에,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 걷거나 달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어른'이란 존재다.


그렇게 정체성을 내게서 찾아냈다면, 외부 조건 변화에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된다. 실직을 하든, 승진 경쟁에서 밀리든, 사업하다 망하든, 연애와 결혼에서 실패하든 그게 뭐든 - 그것은 굳건한 자아 정체성과 존중감에 비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작은 사건들에 불과하다.


자아 정체성을 내게서 찾지 못할 때 인간은 더 쉽게 좌절하고 허무해진다. 내가 아닌 다른 외부의 것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게 뭐든, 그러한 자는 결국 허무함만 느낄 가능성이 높다. 내 것이 아닌 직장에서 목숨을 걸고 승진 경쟁, 내부 정치질, 암투만 벌여온 사람이 그 직장에서 잘리거나 물러나면 그 이후 그 자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나란 존재의 의의가 전부 그 직장에 걸려 있었다면, 그 직장에서 나오면 그 인간은 당분간 삶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아야 할지 헤맬 수밖에 없다.


반면, 그 직장도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고 느껴왔었다면, 그는 어딜 다니든 어딜 관두든 모두 별 감흥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내'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더 정밀하게 깎여진 '나'란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답과 해석을 마음에 품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정체성은 내게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고통과 실패들을 내 자양분으로 여기고 심상을 다지며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란 인간에 대한 답이 하나씩 자연스럽게 내려지고,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알면서도 '존재의 보편성'을 근거로 나를 사랑하는 단계로 뻗어갈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자신만의 선과 기준(주관)이 확고해지는 거다. 그리고 이후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삶을 의탁하지 않은 채 굳건한 자아 정체성과 존중감으로 내 생을 마음껏 펼쳐 나갈 수 있다.



해당 글은 2019년 12월 ~ 2023년 12월 기간 동안, '최해룡'이란 채널명(필명)으로 썼던 브런치 콘텐츠입니다. 2024년 2월 브런치 채널명을 <신흥자경소>로 바꾸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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