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이 그립고 그리워
'이별수' 그런 게 정녕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올해는 나에게 이별수가 들어온 해인가.
마음 추스를 새도 없이 이별이 연이어 온다.
10년 넘게 다닌 단골 샤브샤브 집이 없어졌다.
좋아하는 케이크를 팔던 오래된 동네 빵집이 없어졌다.
15년 넘게 침을 놔주시던 원장님이 한의원을 팔고 은퇴를 하셨다.
오랜 시간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던 곳들에 불이 꺼져있고, 셔터가 내려가 있고, '임대문의'가 붙어있었다. 한의원의 내부 구조는 싹 바뀌어 있었고, 그 안에는 낯선 이가 있었다. 당황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현실을 부정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수가 없다. 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영원한 건 없다는 참인 명제를 잊고 있었다. 인사도 못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무얼 하시든 잘 지내시면 좋겠다고 말도 못 했다.
아쉽고, 서운하고, 슬펐다.
더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가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일로 알게 되기도 했고 내가 워낙 소심해서 그녀와 사적인 약속을 잡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첫 약속을 잡고서, 좋은 예감이 들었다. 마음 맞는 친구가 한 명 더 생길 것 같은 느낌. 예정되어 있는 약속도 기대가 되었지만, 그 너머의 시간들도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그 친구가 곧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너무 오래 머뭇거렸다. 앞으로 친해질 기회를 많이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의 어리석은 늦장이었다.
아쉽고, 서운하고, 슬펐다.
그래도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만나서 직접 건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크고 작은 이별을 소화해 내며 상반기를 정신없이 보냈다. 어쩜 이러지. 그리고서 맞은 9월,
약 5년 간 함께 일했던 부장님이 일을 그만두셨다.
이별수가 내게 궁극기를 때렸다. 정신을 못 차리겠다.
한 달이 지났지만 부장님의 빈자리에 아직 적응을 못했다. 여기서부터 글이 잘 안 써진다. 가슴이 먹먹해서. 5년이 한 달 안에 소화될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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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장님을 엄청 많이 좋아했다. 여전히 좋아하고.
그녀는 ISTP, 나는 INFJ.
요란한 거, 주목받는 거 싫어하는 점 외의 모든 면에서 우리는 극과 극이었다. 내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짚을 때 부장님께서는 당장의 상황에 집중하셨고, 내가 감정에 쉬이 동요될 때 부장님께서는 이유와 과정을 먼저 확인하셨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좋아하는 반면, 부장님께서는 돌발상황을 해결하는 것으로부터 쾌감을 느끼는 분이셨다.
그녀는 당신과 많이 다른 내가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늘 알려주셨다. 내가 생각하는 것, 보는 것, 취하는 방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우쳐주셨다.
그런 그녀 곁에서 일하며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눈동자가 흔들리고 어버버대는 대신 인과관계를 따져 문제를 멋지게 해결해 내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사전에 모든 걸 통제하지 않아도 난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 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실력 또한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잘하는 걸 치켜세워주셨다. 앞을 내다보고 필요한 것이나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챙기는 것, 학부모님과 상담할 때 공감 능력을 잘 발휘하는 것,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 등을 자기는 어떻게 그런 걸 잘하냐며 기특해하셨다.
나는 부장님에게 그녀가 잘하는 걸 못하는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그녀는 잘 못하는 걸 잘하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를 그렇게 여겨주시는 부장님 덕분에 서로 다른 우리는 항상 충돌하는 상극이 아니라, 맞물리는 톱니바퀴로 5년 간 동고동락했다.
부장님께서는 영어 강사들을 당신과 똑같은 선에 두고, 늘 존중하고 아끼는 태도로 우리를 대하셨다. 내가 강사가 되기 전, 일개 알바일 때도 부장님은 나를 소중한 일원으로 여겨주셨다. 이곳에 텃세나 모난 사람이 없는 건 오롯이 부장님의 따뜻한 성품 덕분이었다. 윗물이 맑아서, 아랫물도 맑았다.
'이렇게 하는 게 내가 편해서 그래.'라는 입버릇으로 그녀는 타인에게 베푸는 자신의 배려를 스스로 절하하셨다. 진짜 그럴 수도 있다. 진짜로 그 편이 그녀에게 효율적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폭력성을 가진 친구, 장난기가 심한 친구들이 한 차량에 모였던 학기가 있었다. 내가 그 차를 타는 걸 너무 힘들어하니, 부장님께서 당신이 타야 하는 차와 바꿔주셨다. 그녀의 표현을 빌려서, 내가 힘들어하는 걸 계속 보는 것보다 그녀가 그 차를 타버리는 게 진짜 속 편해서 그러셨을 수도 있다. 거창한 친절과 배려가 아니라.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다. 사람 마음이 자기가 편한 거, 쉬운 거 하고 싶지. 그걸 누르고 나의 문제를 부장님께서 안아서, 나에게서 그 문제를 삭제해 주시는 것 그 자체가 친절과 배려지. 그게 아니면 뭐람.
부장님은 일을 잘 못 나눠주는 타입이셨다. 본인이 다 끌어안고 가시곤 했다. 부장님이 바쁘시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편의를 봐주고 계시는 거다. 그걸 잘 알아서, '부장님 제가 뭐 도울 거 없어요?'가 내 말버릇이었다. 물어보면, 손에 코팅해야 되는 거 쥐고 계시면서도 없다고 하셨다. '저 지금 시간 있는데! 나 놀고 있는데!' 하면, '가서 놀아!' 하셨다. 맨날 없대. 흥. 그러면 내가 찾아서 하지!
강아지 마냥 나는 부장님을 정말 많이 따랐다. 부장님을 진-짜 좋아했다. 부장님 만날 생각에 출근하는 게 즐거울 정도로.
부장님의 마지막 근무 날. 점심시간에 간단한 은퇴식이 있었다. 씩씩하게 박수만 치고 끝난 내게 한 선생님께서 '제일 많이 울 줄 알았는데, 안 우네요?'라고 하셨다. 속으로 엉엉 울었다는 말을 삼키고, 헤헿 웃고 말았다.
그날 퇴근 전, 부장님께서 나를 붙들고 본인의 수업 노하우를 끝에 끝까지 알려주셨다. 올해 영어 강사 초임인 나를 두고 가시는 게 맘에 걸리셨나 보다. 하나도 안 놓치려고 받아 적으면서 또 속으로 울었다.
다 적고서, 손 편지를 씩씩하게! 건네 드렸다. 부장님께서 편지를 받으시고, 나에게 고마웠던 것들을 말씀하시다가 우셨다. 그런 부장님을 보고, 나도 뿌엥 울었다. 입꼬리가 턱 끝까지 내려간 채로. 그렇게 서럽게 눈물이 삐져나온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울다가 마지막 하원 차량을 나가야 해서 내 교실로 돌아와 허겁지겁 짐을 챙겼다. 친구 선생님이 곁에 왔길래, '아!!! 나 잘 참았는데 결국 울었어어어어 엉엉ㅠ0ㅠ' 했더니 '봤어ㅋㅋㅋ'하고 놀린다. 자기는 아까 아이라인 다 지워지게 울어놓고는ㅡ.,ㅡ. 결국 막내 둘이 제일 많이 운 게 되었다ㅋ_ㅋ. 나는 사실 내가 울 줄 알고, 그날 눈화장 안 하고 갔다ㅋㅋㅋ 치밀한 J. 그 덕에 팬더인 채로 하원 차량 타는 일은 없었다.
5년 그 사이에 부장님 속을 썩이기도 하고, 상처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서운하거나 속상한 것 보다 기쁘고 좋은 게 훨씬 많았다. 훠얼-씬. 복 받은 직장 생활이었다.
하아. 부장님이 보고 싶다. 너무너무 보고 싶다.
부장님께서는 5년 내내 이름 두 자로 나를 부르셨다. 전화받으실 때도 '여보세요'라고 안 하시고, 항상 내 이름 두 자로 받으셨다. 다정하고 따뜻한 톤으로 '효인~' 아니면 영어 이름으로 '노아~' 이렇게. 나는 그게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부르시면 좋아서 혼자 배실배실 웃으면서 튀어가곤 했다. 부장님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해서 부장님께서는 모르실 일. 그 부름도 다시 듣고 싶다.
부장님은 나의 상관으로서, 책임자로서 나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늘 불편할 일, 번거로운 일, 성가신 일, 곤란한 일을 가로채 가셨다. 내가 무언가에 애를 쓰고 있는지 알아주셨고, 내가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그리고 날 키워주셨다. 멋지고, 진정한 상사셨다.
그런 분과 5년 간 일을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행운이었다.
그 시간을 가슴에 감사함으로 새겨야지. 평생 잊지 않아야지.
부장님,
‘행복’을 연구하시는 서은국 교수님이라고 아세요? 그분이 말씀하시길, 일상에서 행복감을 높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이래요.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과의 사회적 경험의 합이 행복감에 큰 영향을 미친 대요.
저는 지난 5년 간 행복했어요. 매일 마주치는 사람이 부장님이라서, 저의 일상에 부장님이 계셔서 행복했어요. 진심으로요.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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