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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줄이 걸린 직장에 친구가 어딨어

요깅네~

by 작사가 신효인


이번 주에 일이 많아 바빴다. 힘들었던 것 같다. 아니, 그랬다. 닷새 내내 머리가 아팠으니까.

근무하는 곳에 유일한 동갑내기 선생님이 있다.

엠마는 쿨하고, 성격에 구김이 없고, 에너지가 많고, 거침없고, 명랑하고, 모든 이를 밝고 친절하게 대한다.


꼼꼼하고, 그늘이 있고, 에너지가 적고, 소심하고, 차분하고, 내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태도가 명확히 구분되는 나와 많이 다르다.


나는 20대 초반에 일을 시작했고, 엠마는 20대 끝자락에 첫 직장을 가졌다. 찌들고 닳은 나와 순수한 그녀 사이의 간극도 존재했다.


집에서 나는 맏이, 엠마는 막내였다. 판이한 결을 선명하게 느낄 때마다 우리는 친해질 수 없겠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나는 직장에서는 절대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직장은 밥벌이를 하는 곳이다. 그 내에서 누군가와 잘 지내다가도, 나의 생존에 저 사람이 위협이 되는 순간 관계가 무너질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걸 20대 내내 보고 컸기에, 직장에서 누군가와 척을 질 필요는 없지만, 필요 이상 가깝게 지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엠마는 쉬는 시간일 때면 카운터에 앉아있는 내게 쪼르르 와서 쫑알대곤 했다. 처음에는 사회생활 차 들어주고, 적당히 리액션을 해줬던 것 같다. 마음은 내어주지 않은 채.


그녀는 내가 거리를 둬도 개의치 않았고, 뒷걸음 치면 그 두배로 다가오곤 했다. 아니, 친구도 많으면서 나한테 왜 자꾸 들이대는 거야. 거리 두고 뒷걸음치는 거 알았음에도 그랬던 건지 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몰랐을 확률이 높다.


와서 부대끼는 사람에게 '오지 마!', '저리 가!' 할 수가 없어 매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엠마는 사무실에서 화장을 하고 계시는 원장님께 다가가서 '안 해도 예뻐요~ 예뻐!'라고 말하는 캐릭터이다. 자신의 연애사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건넨다. 무려 원장님께! 일반 회사라고 치면 사장님께! 나는 그 이야기 듣고 눈코입 다 동그래졌었다지. 나로서는 상상조차도 안 하는 일이니까. 원장님은 그런 엠마와 코드가 잘 맞았고, 둘은 잘 지낸다. 나는 그게 부럽지도 않았다. 내게는 흉내 낼 엄두도 안 나는 일이라서. 그저 그러는 엠마가, 그럴 수 있는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반대로 엠마는 일찍 출근해서 교구를 만들고, 교실을 꾸미는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는 절대 이렇게 못한다며. 같은 강사로서 자신이 잘 못하는 걸 동료가 잘하면 신경이 쓰이거나, 불편할 수도 있는데 엠마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출근해서 내 교실 들러서는 감탄하고 손뼉 치고 간다ㅋ_ㅋ.

이 외에도 각자 잘하는 분야가 극명하게 다르다.


우리 관계는 마치, 명마가 독수리를 보고

와, 너는 그렇게 날 수 있구나!


독수리가 명마를 보고

와, 너는 그렇게 달릴 수 있구나!


하고 각자 날던 거 날고, 달리던 거 달리는 것과 닮았다.


'너는 왜 그런 날개가 있어', '너는 왜 그런 다리가 있어' 하고 부들대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 사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엠마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한 가지 첨언을 하자면, 우리가 한 직장에서 오래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에는 부장님의 영향도 컸다. 부장님께서는 서로의 장점을 견주어 각자를 보채거나, 닦달하지 않으셨다. '엠마는 이걸 잘하고, 노아는 이걸 잘해.' 모드로 수업과 인력을 관리하는 분이셨다.)

아, 이런 일도 있었다. 유치원 급식에 종종 두부비빔장이 나오는데, 그게 내 입에 무척 맛있었다. 출근할 때마다 '영양사님 뵈면 레시피 여쭤봐야지' 생각했는데, 바빠서 시간도 안 나고 찾아가서 물어볼 용기도 안 나서 어영부영 몇 달이 흘렀다. 엠마와 같이 유치원에 간 날에, 내가 '어! 영양사님 사무실에 계신다. 나 여쭤보고 싶은 거 있는데' 했더니 엠마가 뭐냐고 물었다. 이야기를 해주니 가서 여쭤보란다. 내가 쑥스럽다 하니, '내가 물어봐줄게!' 하고 날 사무실에 끌고 갔다ㅋ_ㅋ. 운은 엠마가 띄우고, 묻기는 내가 물었다. 엠마가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별 거 아니지?!' 하더라. '웅. 근데 난 소심해가지고 이런 거 잘 못 물어보겠어.' 하니, '에이~ 별 거 아닌데 뭘~.' 했던 그녀.

엠마와 나 사이에 내가 세운 벽이 와르르 다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는, 우리가 알고 지낸 지 4년 차가 됐을 때 일어났다. 하루는 출근한 엠마가 내 교실에 와서는 대뜸 책 한 권을 건넸다.


뿌이하고 있는 귀요미. 책을 열어보니 요로코롬 편지도 들어있었다.


책 제목도 인상 깊었지만, 그 안에 편지가 가슴에 더 크게 와닿았다.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에, 예상하지 못한 선물과 감동을 받아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서점에 가서 한 책을 보고 내 생각이 났고,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그 책을 집어서 계산대에 가고, 계산을 하고, 집에 와서 마음과 생각을 더듬으며 편지를 쓰고, 책과 편지를 챙겨서 출근한 그 모든 과정에서 그녀의 진심을 느꼈다. 편지를 읽고서, 마음이 확 열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때라고 딱 지정할 수는 없으나, 언젠가부터 그녀와 부쩍 더 가까워지고 그녀가 편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내가 그녀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녀가 내게 받아들여지는 순간들을 경험했고, 그게 누적이 되면서 신뢰와 애정이 높게 쌓인 것 같다.

엠마는 작년에 결혼을 했다. 신혼집이 우리집 근처라서, 번개로 나를 종종 초대한다. 그런 날에는 퇴근하고 엠마 네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


또 갈래 (뻔뻔)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선 뚝딱뚝딱 저녁을 차려준다. 둘 다 일하고 왔는데 말이지. 요리하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고마우면서도, 피곤하지 않을까-무리하는 건 아닌가-내가 폐 끼치는 건 아닌가 마음이 쓰인다. 맛있는 거 먹고, 수다 떨고 하다 보면 서너 시간은 훌쩍 간다.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시계 보고 기겁을 하는 편. 그만큼 같이 있는 게 즐겁다.

엠마는 나의 간식요정이기도 하다. 종종 집 앞에 찾아오거나 내 교실에 와서 빵, 과일, 디저트 등의 간식을 주고 간다. 보면 호두파이는 종이호일과 지퍼백으로 서툴게 포장이 되어 있고, 딸기는 씻어서 꼭지가 따여 컵에 포크와 담겨있다. 추석이라고 건네받은 샤인머스캣에는 웃음 터지게 만드는 쪽지가 붙어있었다.


빵순이 환장하게 만드심. 모아놓고 보니 나를 디저트로 꼬셨어. 4년 치 갤러리 등반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관계로 최근 것만 올리겠음 ㅇㅅㅇ.


희한하게도 엠마는 내가 꼭 힘들어 죽겠는 날에 간식을 챙겨와 준다. 나 힘든 날을 점치고 출근하나 싶다. 이번 주 엄청 힘들었던 날에는 엠마가 준 간식을 먹다가 눈물이 돌았다.


나 혼자 너무 진심이었구나 하고 현타 왔던 날. 쉬는 시간에 엠마에게 징징댔다. 퇴근하고 엠마가 준 호두 파이 먹다가 울컥한 보라색 말풍선. 따수운 검정 말풍선.


경계심이 무너지고, 그보다 단단한 벽 마저 무너지고서는 내가 엠마 교실에 더 찾아가고, 같이 놀고 싶어 한다. 점점 의지하려는 게 느껴져서 스스로를 종종 다잡는다.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하자고.

첫 인상을 깨부수고 이렇게 친해진 사람이 또 있던가..? 처음인 것 같다.


서로의 내적, 커리어 성장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 또 있나..? 무이한 것 같다.


더불어 직장에서는 친구를 만들 수 없다는 내 신념을 와장창 부순 유일한 사람이다.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귀한 기회를, 행운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 엠마가 고맙다. 나와 다른 그녀에게서 많은 걸 배우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유달리 빡셌던 이번 주도 덕분에 잘 버텼다!

고마우이. 나도 사랑해 할망.

내일 봐~

(.. 주말 왜 이렇게 짧아 ㅇㅅㅇ..)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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