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를 쓰고 싶어 했던 12살이 진짜 작사가가 된 이야기 2
-작사가 신효인의 이야기, 두 번째-
작사가 지망생 시절, 충무로 인쇄소에서 '작사가' 명함을 받아 들었을 때의 기분이 아직 생생하다.
새로운 세계로 입장할 수 있는 카드가 내 손에 쥐어진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 카드에 따라오는 책임감도 함께 느껴졌다. 두렵고도 설레는 그 묘한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막 나온 따끈따끈한 명함을 가지고, 곧장 집으로 가기는 싫었다. 서울까지 왔는데, 이 명함을 오늘 서울에서 써먹고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 프로듀서님이 있었는데, 주소가 공개되어 있는 프로듀서님의 작업실이 인쇄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편지지를 사서, 인사말과 함께 나를 어필하는 자기소개를 적었다. 그리고 나의 습작도 몇 개 덧붙였다. 봉투에 편지와 명함을 함께 넣고, 프로듀서님의 작업실로 향했다. 도착한 작업실의 현관에는 우편함이 없었다. 나는 작업실 앞을 서성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초인종과 벽 사이 틈에 편지를 끼워 넣고 나왔다. 편지가 과연 프로듀서님께 닿을지, 닿더라도 내게 연락이 올 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으로 ‘작사가’ 명함을 사용하며 이제는 실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사가’로 세상에 나를 알리기 시작한 이상, 나의 부족한 실력을 '작사가 지망생'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작사가 명함이 나왔다고 해서, 명함을 한 번 사용했다고 해서, 상황이 특별히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변함없이 지금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 계속 작사 공부를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소식을 전하며 명함을 건넸다. 모두들 고맙게도, 혹시 관련 종사자를 만나게 되면 날 소개해주겠다며 명함을 여러 장씩 받아갔다. 빠르게 줄어드는 명함을 보면서, 운 좋게 기회가 왔을 때 내가 별 볼 일 없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준비를 잘해놔야겠다는 책임감이 강해졌다.
그런데 습작이 쌓일수록 자신감이 생기기보다는, 되려 나의 실력에 의구심이 들었다. 연습을 통해 내 가사가 더 좋아지고 있는 걸까?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더 좋은 가사가 될까? 혼자서는 그 답을 알 수 없어 어느 순간 막막해졌다. 작사 학원을 다녀볼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꽤 오래 일을 쉬었기에 당장 매달 40-50만 원의 학원비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난 학원을 다니는 대신, 혼자 좀 더 공부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내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작사에 재능이 있긴 한 걸까?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을까? 작사가를 하겠다고 명함까지 파서 주변에 다 뿌려놨는데, 지망생으로만 몇 년을 잡아먹으며 우스워지는 건 아닐까? 이렇게 막막함 그리고 두려움과 혼자 싸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숨이 차듯 내 꿈이 지쳐가는 느낌이었다. '작사가'라는 꿈에 그렇게나 진심이었는데, 쉽게 나가떨어지려는 나 자신이 나약하게 느껴져 더 괴로웠다. 그런 나를 용납할 수 없어서, 더 악착같이 작사 연습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교수님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교수님의 지인이 앨범 프로듀싱을 하는데, 소개해줄 테니 연락을 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나는 멘토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그야말로 선물 같은 연락이었다. 나는 프로듀서님께 고민을 말씀드리며 작사 실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조언을 여쭤봤고, 프로듀서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조언을 해주셨다.
1. 음악을 많이 들어볼 것. 들어보면서 이 곡에 왜 이 가사가 채택됐을지, 회사가 원하는 게 뭐였을지 혼자 나름의 분석을 해볼 것. 회사가 원하는 방향성과 내 가사의 방향성이 맞아야 함.
2. 팝 음악을 하나 골라서, 한국어 가사로 개사를 해 볼 것. 아무리 좋은 가사라도 트랙에 잘 맞지 않으면 무의미하기에, 연습을 많이 해볼 것.
3. 그 연습 과정에서 글감이나 단어 등을 모아 본인만의 빅 데이터를 만들 것.
그리고 프로듀서님은 내게 머리에 확 남는 단어를 주제로, 팝 가수 크리스토퍼의 곡 'Bad'에 아이돌 곡 가사를 하나 써서 달라고 하셨다. 그동안 혼자 해온 연습이 내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가사를 처음으로 전문가에게 선보인다는 생각에 순간 엄청 긴장이 되었지만, 나는 원래 연습해왔던 대로 가사를 써서 보내드렸다. 내 가사에 대한 프로듀서님의 평가는 아래와 같았다.
"전체적인 그림은 나쁘지 않으나, 무드나 표현이 너무 정직해서 밋밋한 느낌이다. 다른 가사들을 참고하며, 글의 색감과 포인트를 체크해보면 좋을 것 같다. 문법상 말이 안 되더라도, 표현이나 느낌이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내가 쓴 가사에 대한 피드백이 간절했기에, 정말 소중한 조언이었다. 나는 프로듀서님께서 해주신 조언들에 집중하며, 다시 혼자 작사 공부/연습에 돌입했다. 밋밋한 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지음 작사가님과 전군 작사가님의 가사들을 읽고 필사하며 '컬러 있는 가사'에 대한 감을 익히려 노력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글자 수 별로 나만의 단어집도 만들고, 가사로 쓰고 싶은 글감이 생기면 팝송에 가사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습작들을 SNS에 꾸준히 올렸다. 가사 텍스트만 올렸던 전과 달리, 이때부터는 영상을 만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노래와 함께 가사를 읽어야, 가사의 진가가 더 잘 전달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난 가사나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진을 골라 개사한 곡을 배경음악으로 입히고, 내가 쓴 가사를 노래의 흐름에 맞춰 자막으로 띄워 영상을 만들었다.
당시 올린 영상이 30개가 넘어갈 때쯤, 이전보다 내 작사 실력이 나아졌는지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쓴 가사들을 한 번 봐주십사 하고, 조언을 해주셨던 프로듀서님께 3개월 만에 아주 조심스레 연락을 드렸다. 프로듀서님께서는 나의 습작을 보시고, 작업 중인 곡이 있는데 이번에 다른 작사가에게서 받은 가사가 맘에 들지 않아 거절하셨다면서, 이 곡에 가사를 써줄 수 있겠냐며 내게 데모 음원을 보내주셨다. 혼자 방구석에서 습작을 쓰는 게 전부였던 내게 다른 분들과 곡 작업을 함께할 기회가 생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난 그렇게 작사가가 되리라 마음먹은 지 16개월 만에, 감사하게도 작사가 데뷔를 했다. 곡이 발매되어, 내가 쓴 가사가 아티스트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걸 들은 그날의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난 드디어 곡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간 진짜 '작사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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