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사가 신효인 Dec 17. 2022

너는 왜 날 질려하지 않아?

사랑하는 내 친구, 휴에게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친구 있는 삶'을 산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안정적이고 든든한 친구 관계를 가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살면서 분명 친구들이 있었고, 나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뭐랄까.. 오랜 기간 안정감 있게 '찐 내 사람!'이라고 느껴졌던 친구는 그동안 없었다. 상처받는 게 싫어서 사람을 많이 가리고, 마음을 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멀어지는 사람 안 잡는 내 성향 탓도 있지 않을까. 


그런 내게 대학생 때 가슴 깊이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들이 생겼다. '여덟 명의 자매들'해서 우리끼리 '8자'라고 부르는 이 친구들은, 성인이 되고서는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 어려울 거라는 나의 편견을 와장창 깨준 이들이다. 얼마 전 8자와 송년회를 했는데, 이번 송년회 때 내 마니또였던 (애칭)의 이야기를 조금 적어보려 한다.


중학생 때 한 번, 대학생 때 한 번 공부하러 미국에 다녀왔다. 대학생 때 갔던 건 겨울 방학을 이용해 다녀오는 단기 교환학생 프로그램이었는데, 휴는 그때 만난 친구이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첫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장소는 인천공항이었다. 출국을 위해 교환학생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수속 직전, 캐리어 무게를 체크하고 기내 반입 가능한 액체류들을 한 곳에 담기 위해 지퍼백을 나눠가지는 등 모두가 부산했다. 그 와중에 커다란 동글뱅이 안경을 쓴, 하-얗고 예쁜 친구가 의자에 앉아 넋 놓고 멍을 때리고 있었다. 


힐끔.


신경이 쓰여서 눈길이 갔다. 수속 준비를 하느라 모두가 분주한데, 그 친구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알아서 하겠지 했지만, 혼자 동떨어져 있는 그녀를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또 힐끔.


이제 곧 수속을 밟으러 갈 참인데, 그녀는 여전히 성실하게 멍을 때리고 있었다.


'혹시 비행기에 들고 탈 가방에 액체 있어요? 100ml 이하는 이 지퍼백 하나에 다 모아야 한대요.'


라며 난 지퍼백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난 원래 먼저 나서서 말을 거는 편이 아닌데.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의 말에 그제야 그녀의 멍이 깨졌다.


30분 동안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요란하게 액체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지퍼백을 나눠 갖고 있었는데, 전혀 몰랐다니. 와우. 안테나가 예민하고 야무진 성미를 가진 나에게 그녀는 새롭고 신기한 캐릭터였다. 그녀가 지퍼백을 나에게서 받아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의 인솔을 따라 하나 둘 수속을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또 한 번 힐끔.


그녀는 이제 막 가방 속 액체류 화장품을 주섬주섬 지퍼백에 담고 있었다. 짐 체크가 일찍이 끝났던 나는 다른 참가자들을 따라 이동을 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몇 박자 늦는 그녀가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결국 난 그녀를 챙기고 이동 행렬의 꼬리에 붙을 생각으로 가방을 괜히 뒤적거리며 그녀를 기다렸다.


힐끔.


우리만 남을 즈음, 다행히 그녀가 짐을 다 정리한 듯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그녀가 당황해하길래,


'저 핑크 패딩 입은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면 돼요.'


라고 말해주니,


'아, 네! 감사합니다!'


하고 그녀는 자기 몸 만한 캐리어를 낑낑대며 끌고 갔다. 그런 그녀를 뒤따르려던 내 눈에 들어온 건, 의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녀의 지. 퍼. 백. 


내가 챙겨서 건네주니, 배시시 웃었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의 첫 만남 속 그녀는 묘하게 마음이 쓰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후, 미국에 도착하고서 첫 등교 날. 교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학교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셨다. 참가자들은 그새 조금 친해졌는지 다들 곧잘 어울려 다녔다. 친화력이 없는 나는 무리해서 어울리려 하지 않는 편이라, 살짝 떨어져서 혼자 편하게 교정을 거닐었다. 어쩌다 옆을 보니 지퍼백 그녀도 홀로였다. 딱히 다가갈 생각은 없었고, '저 친구도 나랑 비슷한 성격인갑다-' 했다. 그런데 얼마 뒤 그녀가 '오오 여기 예쁘다! 사진 찍어줄까요?'라고 내게 발랄하게 말을 걸었다. 내향적인 사람인가 싶었던 건 오산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내향적이어서가 아니라, 무리에서 자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별생각 없이 걷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갑작스레 다가와서 내심 놀랐지만, 아닌 척 '그래요..! 저도 찍어드릴까요?'라고 답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무리랑 뚝 떨어져 버렸다. 저 멀리 보이는 행렬의 꼬리를 빠른 걸음으로 같이 쫓으며, 둘은 자연스레 수다를 떨게 되었다. 서로 나이도 묻고, 전공도 묻고, 남자 친구 유무도 물으며 사소한 대화를 나눴다. 이 날 그녀는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날쯤, 내게 먼저 다가와 '이따가 방에 놀러 가도 돼요?'라고 물었다. 낯가림쟁이+경계심 많은 나는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왠지 싫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똑똑-


호텔 방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여니, 웃으며 맥주 두 캔을 흔들어 보이는 그녀가 서있었다. 


'엇. 나 술 못 먹는데.'


'헤엑? 정말요? 하나도 못해요? 이거 맛있는데! 그러면 맛만 봐요. 남은 거 내가 마실게요 헤헤'


라고 말하며 그녀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즐겁고, 편안하고, 좋았다. 성격에 구김이 없는 그녀는 날 자연스럽고 편하게 대해주었고, 그런 그녀 덕분에 나의 경계심도 늦춰졌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리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지내는 내내 내 방을 자신의 방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는 빠르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만남이 지속되었다. 사실, 우리의 우정이 몇 년에 걸쳐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녀 덕분이다. 정말로.


나는 인간관계에 무척 수동적인 사람이다. 먼저 다가가거나, 연락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정말 없다. 심지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걸거나,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일이 잘 없다. 바쁠 텐데 내 연락이나 약속이 친구들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해서.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 그러하다. 상대는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먼저 다가가는 건 나에게 이래저래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의 인간관계 영역은 절대 쉽게 커지지 않는다. (사람을 상대할 때 에너지가 빨리 소모되는 편이라, 커져도 감당하지 못할 거다.)


이런 내가 그녀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꾸준한 적극성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적극성의 정도와 속도, 방식이 내게 너무나도 적당했다. 과했으면 거부감이 들어 내가 도망갔을 거고, 모자랐으면 사이가 일찍이 끊어졌을 거다.


'나 알바하는 데서 새로운 빵 나왔는데, 사갈게-!'

'주말인데 뭐해? 보고 싶은데 놀러 가도 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아-!'


휴는 이런 식으로 이따금씩 내게 노크를 하곤 했다. 집도 먼데, 귀찮거나 번거롭지도 않은지 항상 우리 동네로 온다. 나를 배려해주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내가 밥을 사려하면, 그녀는 이러면 자기 이제 놀러 안 올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휴를 이길 수 없기에 대신 그녀가 올 때마다, 나는 우리 동네 최고 관광 가이드로 변신한다. 버스정류장 픽업부터 맛집, 뷰 좋은 카페, 예쁜 산책 코스 등을 준비해 놓는다. (풀코스로 마련해둬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ㅎ) 그녀가 차를 가지고 올 때면 주유비하라고 돈을 주는 건 좀 그래서, 카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에 금액을 충전해서 주곤 했다. 휴에게서 받는 게 너무 많아서, 내가 아무리 신경을 써도 모자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처음에는 '얘는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주지?' 싶었다. 나에게 뭐든 아끼는 게 없었다. 그게 싫은 건 절대 아니었는데 누구에게 의지할 줄도, 뭔가를 받을 줄도 모르는 난 맘이 편치 않았다.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휴와 보내는 맑고 밝은 시간들이 좋았기에, 어색하다고 해서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점차 시간이 지나자, '친구 있는 삶이 이런 건가? 친구에게 사랑을 받는 게 이런 건가?'하고 느끼기 시작했고, 그녀와의 교감이 조금씩 편해졌다. 우리가 가깝게 지낸 지 약 3년이 됐을 무렵에야, 그녀에게 내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다 열렸다. 20년 넘게 얼어있던, 경계심 많은 내 맘을 휴가 몇 년 만에 녹여버린 것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가는 친구가,  편이 되어줄 든든한 친구가,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내게 생겼다.


최근에 그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동시에 느낀 일이 있었다. 내내 긴 머리였다가 머리를 짧게 자른 휴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약속 장소에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해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효인찡, 어디야? 아~ 도착했구나. 나는 아직 좀 더 가야 돼. 되게 빨리 걸어가고 있어. 지금 뉴발 매장 지나가. 나 오늘 오전에 스터디 갔는데 (어쩌구)(저쩌구)'


그녀의 수다를 들으며 길거리에 서있는데 휴가,


'어! 너 보인다!'


라고 했다. 난 두리번거렸지만, 강남 한복판 인파 속에서 휴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어디? 난 너 안 보이는데?'


'나는 너 보여! 보여! 뒤돌아봐!'


뒤를 돈 순간, 짧아진 머리를 강아지 귀처럼 팔랑거리며 저 멀리서 내게 뛰어오는 휴가 보였다. 휴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끝까지 뛰어와, 나를 와락 안았다. 


그 찰나의 내 기분을 가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아무리 고민해도, 글에 다 담을 수가 없다. 휴는 나에게 항상 그런 사랑을 준다.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던, 웃으며 나에게 달려오던 휴의 모습은 평생 잊히지 않을 거다. 


나도 잘 안다. 무던한 편도 아니고, 방어기제도 강한 나는 친해지기에 꽤나 까다로운 타입의 사람이라는 걸.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내게, 휴와 같은 친구들이 더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조차 여전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그렇다. 앞서 말했듯 모두 교환학생 프로그램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살맛 나는 인생을 만들어주는 내 친구들을 처음 만났던 그 해 1월 2일은 복권 당첨되었던 날이나 다름없다. 감사한 일이다. 다른 친구들 이야기도 얼른 쓰고 싶다.


이번에 휴에게 썼던 이번 송년회 마니또 편지를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휴야 안녕
내가 바로 너의 마니또야!! 하하
글씨체만 봐도 알겠지?

마니또 안내 문자에 찍힌 너의 이름을 보고, 무척이나 기뻤단다 쿄쿄

우리가 만난 지 만 5년이 되었고, 이제 6년 차를 맞이한다니 감회가 새롭다. 너를 알고 지낸 시간 동안 난 꽤 자주 벅차게 행복했어.

너에 대한 내 마음을 글로 다 담기엔 단어가 부족하고, 종이가 내어준 이 공간이 턱도 없이 작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획 하나하나에 사랑을 꾸욱- 꾹 눌러 담는 중이야. 아, 방금 종이에 빵꾸날 뻔했어. 휴우-

난 너에게 종종 묻고 싶곤 해.

너는 나의 미운 구석을 봐도, 왜 날 미워하지 않아?
나도 미처 다 사랑하지 않는 나를 왜 한결같이 구석구석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줘?
왜 나를 질려하지 않아?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나를 응원해주고, 끊임없는 지지를 보내줄 수 있어?
내가 종종 버겁지는 않아?
너도 나를 만나서 행복해?

이런 물음들이 내 맘 안에 나뒹구는 이유는, 너는 내가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사랑과 안정감을 주는 친구여서야. 살면서 처음 만나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야 넌.

네가 저 물음들에 뭐라고 대답할지, 안 들어도 뻔해.

고마워.
먼저 맥주 두 캔 들고 내 방에 찾아와줘서.
내가 마음 열 때까지 수년을 기다려줘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 걸 항상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
내 삶에 선물처럼 나타나 줘서.
날 변함없이 많이 사랑해줘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줘서.

:)

선물은 너 곧 유럽 가니까, 여행템으로 준비해봤어. 내가 얼마 전에, 송년회 게임 준비하는 중이라면서 너 분홍색 좋아하냐고 톡으로 물어봤었잖아. 그거 뻥~ 이었다~ㅋㅋㅋ 선물로 사주고 싶은 게 네가 좋아하는 하늘색은 품절이고, 분홍색은 재고가 있길래 물어봤어ㅋㅋㅋ 분홍색은 그냥 그렇다고 해서, 그거 말고 이걸 주문했지 후후후. 어때? 맘에 들어?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엉! 너 바로 유럽 가서 교환/환불 못 해ㅋ 걍 쓰렴^_^ 쿄쿄쿄

손 많이 가는 우리 휴야 여권 잘 챙기구, 수속 야무지게 잘 밟아~! 공항에서 또 멍 때리고 있으면 안 된다아~?! ㅋㅋㅋㅋㅋ

유럽에서 돌아오면 우리 바로 또 만나~
건강하게 다녀와
나도 사랑해





https://brunch.co.kr/@shinhyoin/54



휴야


스스로 너무 작아진 날 이 글을 또 보러 왔다면, 들러줘서 고마워.


오늘은 왜 작아졌어?누가 우리 애 작아지게 했어어어!! 다 나와아!!


기억해 휴야. 너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야. 하나라서 특별하고 소중해. 다른 것과 비하지 않아도 돼. 너 자체로 온전하고 완전해. 맑디 맑으면 시리기도 한데, 너는 맑디 맑아도 따뜻한 사람이다. 그래서 비브라늄 소재인 내가 네 곁에 있으면 따뜻해지고~ 말랑해지고~ 그 에너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언젠가 꼭 통할 거야. 


반짝반짝 예쁜 빛을 가진 너인데, 오늘은 그 빛에 슬픔이 조금 묻어있으려나. 문질문질.. 쓰담쓰담..


야, 야, 때 나온다. 이익>_<


혼자서 곱씹고 싶으면 여기서 충분히 뒹굴대다 가고, 직접 듣고 싶으면 꼭 전화해. 사랑해. 메롱.

오늘 이 노래 듣고 자



매거진의 이전글 손이 차가워서 행복한 선생님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