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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가 신효인 Jun 26. 2022

거절당하는 건 정말 두려워

INFJ가 속마음을 숨기는 이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다.


주변에 의지하고 싶지 않거나, 신뢰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아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내가 언제부터, 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나 들여다보니 꽤나 복합적이었다. 그 이유조차 나의 '속마음'이라 조금 쑥스럽지만, 하나씩 풀어내 적어보려 한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나의 슬픔을 반으로 나눠 상대에게 지우는 게 난 싫다. 그래서 슬픔, 우울, 힘듦, 화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혼자 해결하려고 특히 더 애를 쓴다. 작은 예를 하나 들면, 어느 날 친구에게서 보고 싶다고 출근 잘했냐고 묻는 카톡이 왔다. 사실 그날 너무 피곤해서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겨우 출근을 했지만, 티 내지 않고 '웅 출근 잘했지~'라고 답장을 보냈다. 친구에게 솔직하고 편하게 '으에~ 나 오늘 너무 피곤해~'라고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소중한 이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징징이 또는 투덜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은 컨디션을 이겨내고 오늘 하루를 잘 보내야 하는 건 나 자신이고, 스스로 헤쳐가야 할 일이니까. 어디가 심각하게 아파 병원을 갈 정도인 것도 아닌데, 친구가 인사로 물은 안부에 솔직하게 답을 해서 대화의 주제가 '나의 피로'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면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은 잘 나누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것도 아니다. 누가 내게 '좋은 일 있었다면서! 자랑 좀 해줘 봐~'라고 하면 조금 멋쩍어도 이야기하는 게 어렵지 않은데, 내가 먼저 나서서 알리는 건 잘 못한다. 나의 행복이나 기쁨을 꺼내서 타인과 공유하는 게 어색하다. 좋은 소식을 말하는 내 모습이 겸손하지 못하거나, 팔불출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신경 쓰이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기쁜 일이 생기면 혼자 '히히' 하고 신나 하거나, 많이 업 되어 있던 내 감정이 시간이 지나 조금 진정이 되면 그제야 가까운 이들에게 소식을 슬쩍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까지 글을 적으면서, '난 왜 이렇게 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한 사람들과 크고 작은,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을 나누는 게 삶의 재미인데. 같이 축하도 하고, 욕도 하고, 위로도 하는 게 인생의 맛인데. 나는 왜 제 발로 그 재미를 걷어차며 사는 걸까? 왜 외톨이를 자처하는 걸까? 


사실 난 원래 이렇게까지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타인으로부터 감정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공감받고 싶은 욕구가 매우 커서, 맘을 터놓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한 뒤 상처받는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의 성향으로 점차 변하게 되었다.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내게,

걔가 원래 말을 좀 거칠게 해. 그냥 그러려니 해. 너 그렇게 쉽게 상처받아가지고 사회생활은 어떻게 할래?


불안도와 긴장도가 높아지면 복통, 가슴 답답함 등의 신체 증상이 생기는 내게,

넌 왜 이렇게 아픈 데가 많아?


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듯한 말들에 난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계속 하면서 '내게 상처를 주는 이' 말고, '내 맘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이때부터 나의 인생은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여정'이 되었다.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줄 사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다.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러한 소울메이트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길고 긴 여정은 기대와 실망의 반복이었고, 결핍은 더 심해졌다. 난 이내 깨달았다. 상대가 내 맘을 알아주길 기대하지 않으면 서운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일일이 서운해하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심신에 좋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지금의 성향을 갖게  시작은, '자기 방어'였다. 이해나 공감을 받지 못해 상처받는 경험, 내가 타인에게 부담이 되는 경험, 나를 거절당하는 경험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경험들은 오랜 기간 폭력과 따돌림을 당한 내게는 너무나 치명적이었기에, 생존을 위해 생긴 방어 기제였다. (폭력과 따돌림은  자체에 ' 네가 너무 싫어' 내포하고 있기에, 그걸 오랫동안 겪은 내게 '거절' 정말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내게 - 소중한 이들에게는 더더욱 맘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혹시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일이 생기면  상처는 감당하지 못할  같았다. 인생이 끝나는 기분이   같아 두려웠다. 그렇게 깊은 속내를 말하는  없이  오래 지냈던 내가 뒤흔들어진 일이 작년에 있었다.


친구의 집들이를 위해 4명(나는 INFJ, 친구들은 ENFP, ENFJ, ISTJ)이 모여 밤새 수다를 떤 날이었다. ENFJ 친구의 독립을 축하하는 자리라서 그랬을까, 평소보다 진지한 이야기들이 많이 오갔다. 새벽 2시쯤 되어 긴 수다를 마치고 자리를 파하려는데, ENFP인 친구가


아니, 잠깐만. 우리 오늘 효인이 이야기는 하나도 못 들었는데? 나 궁금한 거 엄청 많은데! 안돼. 이대로 집에 갈 순 없어. 다들 앉아. 앉아.


라고 말했다. 내 속내를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편해서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재미있는 수다는 친구들 몫이고, 난 보통 리액션과 질문 담당이다. 그런데 저 날은 진지한 대화를 경청하느라 내가 말이 유독 적었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가 마련해준 스포트라이트 덕에, 나의 토크 콘서트가 느닷없이 열렸다. 새벽 6시까지, 무려 4시간짜리로.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그동안 말 못 했었던 나의 무거운 사연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처음으로 내 속을 다 긁어내 보여준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때 친구들에게서 '거절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오랫동안 꾸준히 느끼게 해 줬던 안정감과 사랑, 신뢰 앞에서 나의 경계심과 자기 방어가 해제된 순간이었다.


네 시간 동안 내가 나눈 것들 중에 듣기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다 슬프고 마음 아픈 내용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긴 시간 내내 눈 맞춰 이야기 들어주고, 같이 눈물 흘리는 내 친구들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마지막에는 다들 날 꼬옥 안아주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정말 소중하고 따뜻한 경험이었다.


이 날을 계기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편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더 어려워졌다. '내가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니 그 행복을 또 한 번, 아니 반복해서 느끼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누구에게도 맘을 기대지 않겠다며 지금껏 틀어쥐고 있었던 고삐가 풀려, 이 욕구가 통제불능으로 날뛰게 될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친구들에게 점점 의지하다가 내가 선을 넘어버릴까 봐, 결국에는 친구들이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경험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새벽 6시까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날 뒤로, 난 며칠 동안 '동굴'에 들어가 버렸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맘을 다독이고 상태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친구들이 나에게 질리지 않고, 소중한 우리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루틴에 갇혀버렸다. <친구들을 만나면 나를 감추는 자기 방어가 해제되고-내 이야기를 하고-집에 돌아와서 동굴에 들어가고>의 반복이었다. '나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강박'과 '나를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도저히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나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행복하면서도, 한편 너무나 불안했다. 친구들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올라갈수록, 이 친구들이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결국 또 혼자가 되는 것, 버려지는 것)에 대한 불안도도 같이 높아졌던 것 같다. 이 문제를 혼자 해결하기 어려웠던 나는 심리상담 선생님을 오랜만에 뵙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효인 씨는 친구들이 효인 씨에게 힘들었던 일, 속상했던 일,  나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땠어요?
음.. 친구를 속상하게 만든 사람한테 화가 났고, 같이 욕 하고 위로해줬어요. 그리고 친구가 이야기해줘서 고마웠어요. 한 번은 ISTJ 친구가 맘이 엄청 안 좋았던 시기를 혼자서 극복해내고 나중에 '나 사실 그때 이래서 우울하고, 저래서 힘들었었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친구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었다는 것에 엄청 미안했고 또 속상했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 힘든 일 이야기해주면 고맙더라구요.
그랬군요. 친구들도 같지 않을까요?
..!!!


나는 선생님의 마지막 되물음에 머리가 띵했다. 선생님이 물어봐주시기 전까지는 친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해보질 않았다. '나는 친구들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라는 일방적인 생각에 나는 왜 계속 갇혀있었던 걸까? 이걸 깨닫고 나자, 나의 강박과 두려움을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생겼다. 며칠 뒤, 친구들을 만나 나의 심리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에 친구들은 아래와 같이 답을 해주었다.


ENFP
나는 힘들 때 너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너에게서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어서 행복해. 내 고민도 정말 잘 들어주고,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잖아. 너는 나에게 그런 친구고, 나도 너에게 그런 친구면 좋겠어. 쇼핑 스타일이 잘 맞는 친구가 있고, 일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가 있고, 취미 생활 같이 하는 친구가 있고 그렇잖아. 효인이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친구라서 좋아. 그리고 무거운 사연이 많은 너라서, 종종 우울한 너라서 널 만나면 우리가 안 좋은 기운을 얻어간다거나 너에게 질려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마. 절대 그렇지 않거든. 너는 너 특유의 분위기와 매력이 있어. 자꾸 보고 싶게 만들어ㅋㅋㅋㅋ


ENFJ
맞아. 같이 있기만 해도 좋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늘 진심으로 들어줘서 나는 너 만나고 집에 들어가면 내 맘이 한결 편안해져. 그래서 내 고민도 너에게 다 이야기하고, 너에게 더 찡찡거리고 싶어지고! 그리고.. 말 안 하면 네가 너무 힘들잖아. 이야기해야지 왜 안 해! 내가 제일 감정적으로 교류 제일 많이 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너인데, 너는 나한테 의지를 안 하면 어떻게 해!


ISTJ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해서, 네 이야기 들을 땐 듣고 또 자기 삶 사느라 잊어버려. 듣는 사람 힘들 것까지 생각해서 그러지 말고, 힘들 땐 이야기해. 듣는 사람도 자기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들으니까. 그리고 사연 없고 우울감 없는 사람이 어딨어. 괜찮아.


친구들의 대답을 듣고 나니, '거절'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답시고 그동안 내가 마음고생을 사서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새벽 6시까지 했던 대화부터 해서 1년을 넘게, 내가 '이런 나여도 괜찮냐'라고 수차례 이리저리 돌려 물어도, 내 친구들은 항상 '그런 너라서 좋아', '괜찮아'라고 답해주었다. 다시 불안해졌을 때 또 묻는다 해도, 내 친구들은 내게 같은 확신을 줄 거다. 이렇게 친구들이 선물해준 '내가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나를 조금씩 변하게 만들었다.


우선, '거절' 당하는 게 조금 덜 두려워졌다. 어쩌다 '거절'을 당해 상처를 크게 받더라도, 울면서 쪼르르 달려가 위로받을 믿는 구석, 비빌 언덕이 내게 있으니까. 그거 한 번 거절당한다고 이 세상에 나 혼자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너무나 잘 아니까. 더불어 '그래! 이게 나야! 어쩔래!' 마인드도 생기고, '나랑 인연이 아닌가 보다~'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속상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있잖아 나 푸념 하나만 해도 돼?', '혹시 통화 가능해?'라며 말을 꺼낸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이나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 혼자 애를 쓰고 쓰다가 잘 안 될 때, '이 정도면 내가 친구들에게 쉽게 의지하려는 게 아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정도이다.' 싶을 때만 이야기를 꺼낸다. 여전히 선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중하니까. 친구들은 내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가족도 마찬가지-


내가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게,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거라는 걸 이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자연스럽지 못한 이런 행동이 되려 나의 인간관계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걸 깨보고자 나를 드러내려 조금씩 노력 중이다. 브런치에 나의 이야기를 발행하는 것도 그러한 노력들 중 하나이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보면, '내가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또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직은 연습 초기라, '나'를 드러내고 나면 솔직히 힘이 든다. '깊이 숨겨둔 나'를 꺼내 보여주는 작업 자체도 에너지가 많이 들고, 그런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신경이 쓰여서 그렇다. 지칠 때도 있지만 넘어졌다, 다시 일어났다 하면서 천천히 계속 나아가는 중이다. 시간이 꽤 걸리더라도 성공 경험을 차차 쌓다 보면, 나를 잠식할 정도로 매서운 기세의 자기 방어가 언젠가는 나를 적당히 보호할 수 있을 만큼으로 작아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ENFP야, ENFJ야, ISTJ야

내가 넘어졌을 때 기댈 수 있는

믿는 구석, 비빌 언덕이 되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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