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비가 굉-장히 많이 쏟아졌던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몸이 많이 아팠다. 학교를 다녀온 나는 자고 있는 엄마 옆에서 혼자 TV로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를 보고 있었다. 한참 재밌게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시계를 보니, 동생의 유치원 버스가 집 앞에 도착할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엄마를 흔들어 깨우려다, 아파서 자고 있는 엄마를 보니 그러기가 미안했다. 그래서 우산을 챙겨 들고 혼자서 동생을 데리러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파트 밖을 보니, 하늘은 아주 어두컴컴했고 장대 같은 비가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혼자 올라타, 1층을 눌렀다. 몇 층을 내려갔을까.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덜컹 멈춰 서면서, 엘리베이터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정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너무 무서웠다. 어둠이 무섭다고 느꼈던 첫 기억이다. 어디선가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우산을 펴고 그 안에 들어가 쪼그려 앉아서 공포에 떨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흐른 뒤, 어디선가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사람 있어요?
엘리베이터 내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우산에서 고개를 내밀고 사람 있다고 대답을 하자, 아저씨는 내 목소리에서 나이를 감지하셨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 곧 고칠 거라며, 겁먹지 말라며 나를 안정시켜주셨다. 엘리베이터에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저씨께서는 내게 이런저런 수다를 건네거나 내가 무섭지 않도록 노래를 불러주셨다. 그때 불러주셨던 노래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였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칠흑 같이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귀신이 나오진 않을까, 내가 어떻게 되어도 아무도 모르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들었던 두려움은 아저씨 덕분에 어느새 작아졌다. 그러자 이내 동생 생각이 났다. 나랑 엇갈려서 동생도 혹시 옆 엘리베이터에 혼자 갇히진 않았을까, 비를 맞지는 않았을까, 집에 잘 갔을까 그 와중에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쳐갈 때쯤,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계신 경비 아저씨 뒤로 엄마와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동생이 보였다.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다. 엄마가 너무나 반가웠고, 동생이 무사해서 다행이었고,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해서 기뻤다. 우리 집이 맨 꼭대기 층이었음에도 그 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고, 결국 우리 가족은 1층으로 이사를 갔다.
말을 걸어주고, 노래를 불러주셨던 아저씨는 누군지 아직도 모른다. 경비 아저씨셨을까? 그렇다기엔 목소리가 젊었는데. 그러면, 엘리베이터 회사 직원이셨을까? 모르겠다. 문이 열리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가느라 직전까지 말을 건네주고 계셨던 아저씨께 인사도 못 했다. 이때를 생각하면,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분께 너무나 감사하다. 그의 친절함이, 다정함이 지금에 와서도 감사하다. 이날의 후유증이 남긴 했지만, 장담하건대 아저씨 덕분에 후유증이 비교적 덜 남은 것일 거다.
위 사건으로 인해 공기가 통하지 않는 답답한 곳이나 빛이 없는 곳에 있을 때, 숨이 턱 하고 막히는 후유증을 갖게 되었다. 특히 내가 다룰 수 없는 기계로 된 공간에서 더 그렇다. 고장이 나서 갇힐 수 있다는 두려움, 누군가 고쳐주기 전까지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공포감이 아직 남아있다. 그래서 난 지하철과, 창문을 열 수 없는 버스를 타는 걸 안 좋아한다. 관람차도 안 좋아하고.
한 번은 성인이었을 때 창문을 열 수 없는 버스에서 숨이 안 쉬어져서 과호흡이 온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또 과호흡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몇 년간 대중교통을 타지 못했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차가 어려운 곳도 있고, 직접 운전하는 것보다 버스를 타는 게 훨씬 효율적인 경우도 많았다. ‘대중교통’과 ‘자동차’ 두 가지 카드를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동차’ 하나의 카드만 쓸 수 있는 게 어느 순간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 적지 않게 찾아오는 그 불편함이 싫었던 나는 이제 트라우마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그래서 작년 말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훈련을 꾸준히 했다. 시간 되는 날 버스를 타고 서울을 찍고 오곤 했다. 배가 부르면 호흡이 힘들어서 공복으로. 편하지는 않았지만, 반복해서 연습을 하니 버스는 어느 정도 탈 만하게 되었다. 땅 밑으로 들어가는 지하철은 거부감이 훨씬 커서, 지하철 이용은 계속 미뤘었다. 그런데 최근에 버스에서 지하철로 환승해 사당역을 다녀오는 데 성공했다. 자의 반,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반으로 이뤄낸 성공이었다.
사당역에 사는 친구가 코로나에 걸려서 갑작스레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었다. 당시 친구는 컨디션이 안 좋고 후각과 미각을 상실해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약 복용을 위해 식사가 필수였기에, 친구에게 음식물 섭취는 거의 미션 수준이었다. 힘들어하는 친구와의 통화를 마치고, 친구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았다. 친구는 날 만나러 내 동네로 자주 와주곤 했는데, 친구가 좋아하는 우리 집 근처 빵집의 빵이 번뜩 생각났다. 곧장 빵집에 가서 그 빵을 사 들고, 무작정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지도 어플에 친구네 주소를 찍어보니, 최적의 코스가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타는 루트였다. 버스에서 버스로 환승해 가는 코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난, '까짓 거 뭐 해보지'하고 지하철을 타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친구에게 빨리 빵을 가져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난 거의 5년 만에 지하철에 올랐다. 사실 지하철을 딱 탔을 때는 식은땀도 조금 나고, 호흡도 편치는 않았다. 그런데 이 증상은 내가 '트라우마'를 의식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빵을 받고 좋아할 친구 생각에만 집중해보았다. 그 결과 난 중간에 지하철에서 내리지 않고, 사당역에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철 타기 성공! 친구를 위한 빵 배달도 성공!
빵 배달을 했었던 날 (사진 사용에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친구에게 감사를..^_^)
위처럼 트라우마 극복 연습을 하면서 느낀 것은, 또 증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그 불안감에 응하는 증상이 빠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더 가빠질까 봐 걱정하며 숨에 집중하는 대신, 창밖을 보고 심호흡을 하면 한결 나았다. 과호흡이 왔었던 기억에 집중하는 대신,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상상을 하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7살의 나와 다 자란 지금의 나는 또 다르다고 스스로에게 알려주었다. 지금의 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나에게 믿음을 주었다.
아직 대중교통 이용이 편한 건 아니다. 만원 버스 타는 건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고 어지럽다. 그래도, 훈련 덕분에 이제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대라면 큰 어려움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후유증이 많이 좋아졌다고 느껴진다.
트라우마에서 나오는 건 쉽지 않다. 그 트라우마가 너무 불편하고, 버거울 때면 ‘왜 하필 내게 그런 일이 생겼던 걸까’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살아가야 하니까, 이미 벌어진 일을 붙잡고 투덜댈 수만은 없었다. 트라우마로 인해 삶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나 자신을 내가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능숙하게 잘하는 걸 내가 잘 못 한다면, 잘할 수 있게 스스로를 도와줘야 했다. 연습을 시켜줘야 했다.
당사자의 극복 의지도 중요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주변의 이해와 도움, 그리고 인내가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 컸다. 부모님은 내가 차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고, 어딜 가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신 차를 갖고 다니는 것을 이해해주셨다. 친구들은 약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차가 어려운 서울에 날 부르지 않고, 항상 날 만나러 우리 동네까지 먼 걸음 해주었다. 그리고 나의 연습을 응원해주었고, 여러모로 마음을 써주었다. 후유증을 이겨내 보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건, 나의 후유증이 나아진 건 모두 주변 사람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