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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가 신효인 Aug 01. 2022

실수 후,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요?

'실수'의 진정한 의미는


나는 완벽주의자이다. 자신의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악-!'


최근에 발을 다쳤었다. 그날은 분리수거물을 배출하는 날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온 나는,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분리수거를 서둘러 다녀오려 했다. 그래서 후다닥 가방을 벗어 내려놓다가, 가방으로 책상 위에 있던 무거운 빈 컵을 쳤다. 컵은 떨어지며 나의 새끼발가락과 그 주변 발등을 강타했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고,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이 밀려왔다. 발을 부여잡지도 못하고, 그저 한참을 바닥에 앉아 끙끙댔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나자, 정신이 조금 돌아왔고 이내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발가락이 부러지지 않았을까..? 과연 걸을 수 있을까..?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5분이 더 흐르자 통증이 꽤 걷혔고, 걸어볼 용기가 생겼다. 나는 맺힌 눈물을 슥슥 닦고 일어나, 몇 걸음 걸어보았다. 정말 다행히도 걷는 데 문제가 없었다. 발이 완충 작용을 해서 컵이 깨지지 않은 것에, 발가락이 부러지지 않은 것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에, 내일 출근할 수 있는 것에, 분리수거를 하러 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보니, 발등에 컵이 떨어졌었던 일은 분리수거를 다녀와 저녁을 먹고, 씻고, 할 일을 하고, 잠에 들면서 내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집에서 나서기 전, 양말을 신는데 새끼발가락과 발등에 걸쳐 지름 5cm 정도의 새까만 보랏빛 멍이 든 걸 발견했다. 멍이 정말 심하게 들어서, 보고 깜짝 놀랐다.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새끼발가락과 네 번째 발가락을 만져보니, 젖히거나 구부릴 때 통증이 있었다. '괜찮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난 출근을 해야 했다. 발을 더 들여다보거나, 병원을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필자는 부업으로 어학원에서 일하고 있다.)


출근해서 아이들을 학원 버스에 승하차시키며 차를 오르내리다 보니, 발에 통증이 조금씩 느껴졌다. 심하진 않았지만, 조금 거슬리는 정도로. 며칠 뒤 멍이 빠지고도 통증은 오래갔다. 그러자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왜 가방으로 컵을 쳐가지고, 왜 덜렁대 가지고 안 아파도 될 거를 아파하고 있는 거냐면서. 살면서 어쩌다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이만하길 다행인 것도 알았지만, 다급하게 서둘렀던 당시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발이 아파서 주저앉아있던 시간까지 고려하면, 서두르지 않았을 때보다 분리수거를 끝내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고 통증까지 덤으로 얻었으니까.


그런데 일기장을 펼쳐 이 날을 다시 들여다보니, 발에 컵을 떨어트린 내가 싫고 한심한 것보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저 날은 퇴근하고서 매우 피곤했고, 배가 많이 고팠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컨디션에서 혼자 분리수거를 해야 했고, 오전에 가족이 쌓아놓은 그릇들도 설거지해야 했고, 저녁도 알아서 챙겨 먹어야 했다.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집안일들이 큰 산처럼 느껴졌었다. 잠깐 쉬었다 하겠다고 누워버리면 나를 다시 일으킬 자신이 없어서, 미뤄서 좋을 거 없다며 서둘러 분리수거를 나갔었다. 그날에는 '덜렁대서 발을 다친 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 '할 일을 먼저, 그리고 부지런히 해냈던 나'도 있었다. 고생했던 나를 발견하고 나니, 발에 컵이 떨어졌던 일을 바보 같은 '실수'가 아니라, 하루의 끝에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최선을 다하던 중 일어난 '사고'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애썼다고, 발 아팠겠다고, 고생했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실수한 내가 싫다며 자학할 일은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 그랬을까? 할 일이 많아서, 급한 맘에 더 짜증이 났던 걸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앗차. 정신 차리자.' 하고 가볍게 여겼으면 좋았을 텐데. 이 날을 기억하고, 다음에는 조심하고 차분하면 되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닿고 보니, 내가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엄격했다는 게 더욱 체감이 됐다. 별 거 아니거나 '해프닝'으로 여길 수 있는 것들까지 모조리 '실수'라며 그동안 스스로를 쪼아온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앞선 글에서 고백했듯이 내가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된 건 실수하기 싫어서인데, 그렇다면 난 왜 그렇게까지 실수하는 나 자신이 싫은 걸까? 왜 너그럽지 못하고, 작은 실수-해프닝 하나도 흘려 내보내지 못할까?


아마도 저장되어있는 과거의 경험들 어딘가에 원인이 자리하고 있을 거다. 이 글을 준비하며 그 원인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해보았지만, 아직 제대로 닿지는 못했다. 오래되어 기억 저 편에 있거나, 내가 깊숙이 묻어두었나 보다. 그래도 내면을 뒤적이며 단서를 얻을 수 있었는데, 흐릿하게나마 '혼나기 싫어하는 아이', '버려지고 싶지 않은 아이'가 느껴졌다. 그 아이의 칭찬받고 싶고 예쁨 받고 싶은 욕구는 내 안에 깊게 뿌리내렸고, 완벽주의 성향으로 피어났다. 그래서 실수를 하면 나의 존재 가치가 깎이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감에 스스로 그렇게 채찍질을 했던 것 같다.


완벽을 꿈꾸지만 실수투성이인 나의 일기장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자괴감을 다 모아놓고 보니, 또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내 실수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수를 은근슬쩍 모른 척 하지도, 실수 후에 드는 부끄러움이나 후회를 회피하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맞는다. 불편해도 실수를 바라보고 또 인정하고,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만약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서운함이나 피해를 줬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일기장 속에서 그러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기특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외면하면 '실수'로 끝날 텐데, 받아들이고 수정하며 실수를 '과정'으로 만드는 내 모습이 맘에 들었다. 그러한 과정이 쌓이면 더 나아진 내가 될 거고, 나중에는 '그땐 그랬지. 하하.'하고 웃으며 과거의 실수를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장담하건대, 난 앞으로도 실수를 할 거다. 안 하려고 노력을 해도, 아무리 완벽주의를 추구해도, 생각지 못하게 또 실수를 할 거다. 하지만 내가 왜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실수를 저지른 나의 모습에서 예쁜 구석을 발견하고 나니, 이제는 실수하고서 드는 자괴감을 잘 핸들링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괴감'에 잡아 먹히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참 잘 해내고 싶어 했던 맘을 헤아려줘야겠다.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아니 또 같은 실수를 혹시 하게 되더라도 실수의 크기를 줄여보자고 너그럽게 스스로를 다독여주려 한다. 내 맘을 내가 알아줘야지, 누가 알아줄까.


앞으로 실수한 나를 미워하지 않겠다. 인내해주고, 응원해주겠다. 변화와 성장에는 많은 실수가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자연스러운 과정이니까. 진짜 중요한 순간에 대형 사고 치지 말고, 실수가 허용될 때 자빠지고 구르고 하면서 배우자. (그래도 최대한 실수 안 하고 싶긴 하다 하하하하)




자신의 실수에 대해 그렇게 고민을 한다는 건,

그만큼 성의 있게 인생을 산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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