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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가 신효인 Feb 13. 2022

흑역사가 자려고 누운 나를 걷어찰 때

괴로운 흑역사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흑역사들이 몰려와서는 나를 마구잡이로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너무 괴롭다. 흑역사 하나가 떠오르고 나면, 나 몰래 번호표 뽑고 대기라도 한 듯이 흑역사들이 줄지어서 떠오른다. 자랑할만한 역사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흑역사는 살면서 참 꾸준하게 만든 것 같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열과 성을 다해 흑역사를 만들고 있는 과거의 나를 뜯어말리고 싶다. 그 흑역사가 혼자 창피하고 말 일이라면 그나마 좀 나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던 일이라면 더 미치겠다. 지금에 와 사과를 할 수도 없는데! 이불 위에서 파닥댈 만큼 민망한 것은 물론이고, 흑역사를 만든 장본인인 내가 너무 싫어지기도 한다.


흑역사들과 밤을 지새울 때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곤 했다. ‘이 흑역사들을 어떻게 해야 내가 좀 덜 괴로울까?’ 처음에는 이미 일어난 일이니,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평생 생각날 때마다 창피한 거지 뭐’하고. 그런데 이 생각을 깨준 일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외자인 이름이 너무 멋져 보였다. 내 이름도 외자였으면 하는 마음에, 멋대로 이름 석자 중 가운데 글자를 빼고 이름을 ‘신인’으로 하기로 정했다. 그래서 누가 이름을 물어보면 ‘신인’이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이게 종종 문제가 되었다. 입학한 학교에서나, 새로 간 학원에서나, 병원에서나 등록된 이름과 다른 이름을 내가 말하니 작은 소동이 일어나곤 했다.


‘네 이름이 혹시 신효인 아니니?’

‘저는 신인이에요!’


재차 물어봐도 당당하게 이름이 ‘신인’이라고 외치던 나를 지금 떠올리면 아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학교/학원 선생님이나, 병원에서 접수받는 간호사 선생님이나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까; 죄송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하고 있는 곳에서 과거의 나와 똑같은 친구를 만났다. 출입 명부 작성을 위해 7살 아이에게 이름을 물어봤는데, 그 아이는 자기 이름을 ‘토끼’라고 말했다. 진짜 이름이 뭔지 몇 번을 물어봐도 계속해서 ‘토끼’라고만 대답했다. 너무 바쁜 와중이라 그 아이의 장난이 버거워지려는 찰나에, 순간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아, 이 아이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토끼가 엄청 좋나보다. 자기 이름을 토끼로 하고 싶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하! 우리 친구 토끼 좋아하는구나! 선생님도 토끼 엄-청 좋아하는데! 여기에다가 진짜 이름 적으면, 안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토끼 사진 보여줄 수 있어! 혹시 이름 알려줄 수 있어요~?’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토끼' 대신, 자신의 이름 석자를 말해주었다.


이 날 만감이 교차했다. 이름을 ‘신인’이라고 말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럽기도, 그런 나 때문에 업무 보시는데 불편하셨을 분들께 죄송하기도, 토끼를 얼마나 좋아하면 이럴까 싶어 7세 아이가 귀엽기도, 그 아이의 맘을 눈치챈 내가 기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흑역사’의 의미가 내게 조금 달라졌다. 흑역사는 나를 창피하게만 만드는 게 아니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신인'이라고 외치던 과거의 나 덕분에, 7세 아이의 맘을 알아챌 수 있었고 현명하고 빠르게 일 처리를 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경험하고 나니, 흑역사의 의미가 ‘밤마다 날 괴롭히는 존재’에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경험’으로 바뀌게 되었다.


흑역사를 갖고 있어서 좋은 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두 번째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한 사람에게 내가 너그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내가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하는 상대에게 무작정 화를 내거나 나무라기보다는, ‘그래 나도 그랬었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경험자로서 상황을 좋게 바로 잡을 수 있다면, 그만큼 멋진 어른이 또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흑역사를 모른 체해주며 같이 커가는 것 같다. 멋진 어른들은 다들 이런 흑역사를 갖고 있지 않을까. 아니, 흑역사 덕분에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경험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로 하자.




흑역사는 그 나이답게 커갔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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