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고 더 이상 되묻지 않기로 했다
최근에 나의 이상한 버릇을 하나 발견했다. 행복할 때 '왜?'하고 따지는 버릇.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하고 잘 안 써지는 글을 붙들고 며칠 동안 방에서 씨름을 했다. 수없이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쳐도 글이 맘에 들지 않았다. 글을 완성해놓고 친구와의 약속 날을 맞고 싶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원래 찝찝하게 할 일을 남겨두는 걸 싫어해서, 힘들어도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편이다. 그런데 이때만큼은 '에라 모르겠다!'하고 손이 놔졌다. 엉덩이 무겁게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는데도, 맘에 드는 결과가 나오질 않으니 뭐 어쩌겠나 싶었다.
'탁-'
노트북을 덮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포토 부스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혼자 촬영을 하고 있는데, 도착한 친구가 온갖 요란한 포즈를 다 취하며 포토 부스에 들어왔다. 그런 친구를 보고, 예쁜 척하며 사진을 찍고 있던 나도 지지 않고 야단스럽게 광기를 뽐냈다. 우린 촬영 결과물을 보고 눈물 나게, 숨 넘어가게 웃었다. 포토 부스 속 우리가 담긴 사진과 영상이 너무 웃겨서 보고 또 보며, 하루 종일 꺽- 꺽- 웃었다. (포토 부스에서 사진을 찍으면, 촬영된 사진과 촬영 과정이 담긴 영상을 QR코드로 스마트폰에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
우리는 사진을 다 찍고, 약속의 목적이었던 카페 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가보고 싶어서 메모해두었던 카페들을 이날 다 다녀왔다. 카페 내부 인테리어를 구경하고, 음료와 디저트를 먹어보고, 수다도 실컷 떨고, 판매 물품이 있는 카페에서는 소소하게 쇼핑도 했다. 미처 다 끝맺지 못한 글과 내일 할 일에 대한 생각, 그에 따라오는 근심과 걱정은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마음속에서 완전히 비워졌다. 그저 평화롭고, 즐거웠다.
더운 날에 많이 걸어서,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체력은 바닥이 나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내적 에너지는 충만했다. 기분이 무척 좋았고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속에서 보글보글 끓어 넘쳤으며, 버겁게 느껴졌던 것들이 가벼워졌다. '나 오늘 되게 행복했나 보다' 싶으면서도, '왜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듯했다. 행복해하는 나와, 행복을 견제하는 나. 둘이 다투길 몇 시간, 왜 기분이 좋은지 따져 물으며 컨디션을 망치려는 한쪽 목소리에 문득 짜증이 났다.
오늘 그렇게 재밌게 놀다 왔으니 기분이 좋을 수 있지, 뭘 자꾸 왜냐고 물어봐? 기분이 좋은 것도 문제야? 왜 그러는데? 너 뭔데?
그 목소리는 정말 뭘까? 왜 자꾸 진짜가 맞냐며 기분 좋은 감정을 툭툭 건들고, 경계하는 걸까? 그 목소리를 낸 사람 또한 나이기에,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답은 내 안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좋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를 일기장에 받아 적으며, 내 맘 속에 한 발씩 걸어 들어가 보았다.
나) 기분 너무 좋다. 히히
목소리) 왜? 기분이 왜 좋아?
나) 오늘 친구랑 너무 재밌게 놀았어. 이거 봐봐. 사진 너무 웃겨ㅋㅋㅋㅋㅋ 오늘 쇼핑한 것도 너무 맘에 든다.
목소리) 뭐 그렇게까지 좋을 일인가.
나) 오늘 진짜 재밌었어.
목소리) 너 글 다 썼어? 다 놀고 왔으면 빨리 글 써. 네가 지금 그럴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나) 이제 막 집에 왔어. 여운에 좀 취해있으면 뭐 어때서! 내일 글 완전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기분 너무 좋아.
목소리) 뭔 내일이야. 혹시 내일도 여운에 취해있겠다고, 모레로 할 일 미룰 건 아니지? 그만 진정하자.
나) 난 그냥 지금 기분이 좋은 것뿐이야. 오늘은 이 기분 잔뜩 느끼면서 좀 쉴 거야. 지난 며칠을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글만 썼어. 오늘은 쉬어도 돼.
목소리) 뭐? 아예 하루를 쉰다고? 그렇게까지 기분에 빠져있겠다고? 아니야, 그러지 말자. 빨리 할 일 하자.
나) 아, 왜 이래 진짜아-! 내 기분 망치지 마.
목소리) 어차피 사라질 기분이잖아. 너무 취해있지 말고, 빨리 원래대로 돌아와. 나 불안해.
나) 뭐가 불안해. 이 기분이 영원하진 않겠지만, 느끼고 있는 지금은 즐겨도 되잖아. 내일 할 일 할 거야. 걱정 마.
목소리) 낯설어 이 상태. 기분이 이렇게까지 좋아도 되는지 난 잘 모르겠어.
나) 기분 좋은 게 이렇게까지 경계할 일이야?
목소리) 진짜 기분이 좋은 게 맞을까? 글도 다 못 썼는데,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수 있다고? 그리고 행복한 기분이 금방 사라지면 어떻게 해? 오래 취해있을수록, 사라졌을 때 공허함이 크잖아. 그냥 빨리 흘려보내 주자. 정신 바짝 차리고 얼른 할 일 하자.
마음속에서 위의 마지막 문장을 만난 순간, 머리가 띵- 했다. 글을 써내지 못했으면 일상의 행복을 즐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그리고 사라질 걸 대비해 행복을 손에 쥐고 있는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 내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작가로서 얼른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결과물도 내고 싶어서, 무척 오랜 시간 동안 행복이나 여유는 잊은 채 긴장과 불안 속에서 지낸 나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긴장하고, 불안감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 게 나의 기본 상태였다. 그랬던 내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니, 그 감정이 낯설고 이상할 수밖에. 행복과 기쁨으로 기분이 떠오른 게, 마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허공에 떠있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조금 떠있어도 괜찮은데, 더 붕 떠서 하늘을 조금 날아다니다 와도 괜찮은데, 떠있는 상태가 그저 무섭고 언제 곤두박질쳐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꾸 땅으로 끌어당겼다.
게다가 변화에 약하고 익숙한 게 편하다고 느끼는 성향이다 보니, 평소의 나로 돌아가려 했던 것 같다. 본능적으로, 낯선 행복 대신 익숙한 불안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좋은 기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긴장하고 초조한 상태로 제 발로 복귀하려 하다니. 감정 처리에도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내 마음을 여기까지 들여다보고 나니, 사람의 마음은 회복력(어떤 자극으로 달라진 상태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힘_출처:표준국어대사전)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은 꽤나 강력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태해지지 않으려, 안일해지지 않으려 오랫동안 애쓰며 살아서, 사실 여유를 갖는 법을 잊어버렸다. 나를 위해서 평소에 긴장과 불안 대신, 여유와 평온함을 가져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한 답도 생각지 못한 계기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친구를 만나고 와서, 자꾸 행복에 시비를 따지는 날 문득 발견한 것처럼. 이번에 내 맘을, 내 심리를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 하나의 노력을 약속해본다. 이제 더 이상 기분 좋은 감정에 '왜?'라고 스스로 묻지 않겠다. 행복하면 그저 행복해하겠다. 추락을 미리 겁내지 않고, 떠올랐을 때 조금 더 높이 날아보겠다. 그 비행을 즐겨볼 테다.
내 감정, 내 상태의 원인을 잘 모르겠을 때는
자기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