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그리고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는 사람을 섬세하게 파악해주는 스캐너가 있다.
이 스캐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의 표정, 말투, 눈짓, 제스처 등의 정보를 3초 이내로 내게 제공한다. 나는 그 정보로부터 상대방의 컨디션, 기분 등을 눈치챈다. 사실 이 스캐너는 누구나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이 스캐너를 적절히 사용한다. 그런데 나의 스캐너는 남달리 아주 예민하게, 그리고 쉼 없이 작동한다. 스캐너는 내 시야의 모든 사람들을 스캔해 내게 정보를 주고, 그것도 모자라 실시간으로 정보 업데이트까지 제공한다. 상대의 기분이나 상태를 알고 싶지 않을 때도 말이다. 내가 그 정보들을 모두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 다 처리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이 스캐너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스캐너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면 내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된다. 사람을 만난 지 대략 3시간쯤 되면 간절하게 집에 가고 싶어지고, 4시간이 되면 방전 직전이 된다. 물론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에너지 소비량은 달라진다. 낯선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만나면 빨리 방전되고, 친한 사람을 만나면 다행히도 스캐너가 절전 모드로 들어가 에너지 소비가 적다. 친구를 만나면 되려 에너지가 충전되는데, 그렇더라도 친구를 만난 후에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이렇듯 스캐너의 영향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선호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을 제일 편안하게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홀로 고립된 채, 사람들을 아예 안 만나고 살 수는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과도한 정보로 날 너무 피곤하게 만드는 이 스캐너를 잡아떼서 멀리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도 있었다. 각고의 노력을 해봤지만, 오랜 시간 여러 경험으로 인해 지금의 고성능을 갖게 된 스캐너를 내게서 떼어낼 수도, 전원을 끌 수도 없었다. 이걸 깨달은 뒤 나는 이 스캐너가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은 친구의 차를 타고 베이커리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오르막 길에서 평행 주차를 해야 했고,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친구는 몇 차례 차를 넣었다 뺐다 하며 주차를 시도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있던 발렛 주차 요원은 자신이 주차할 테니 우리에게 내리라고 했다. 그 말에 친구를 바라본 찰나, '내가 하고 싶은데. 나 할 수 있는데.' 하는 친구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내리려는 미동을 하지 않고, '00가 주차 끝까지 해볼래?'라고 친구 의사를 물어봤다. 내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친구는 빠른 주차를 위해 발렛 주차 요원에게 운전대를 넘겨주었다. 카페에 올라와서 친구는 내게, 그렇게 물어봐준 나의 섬세함이 너무 좋고 신기하다고 했다. 고성능 스캐너를 가진 내가 친구의 마음을 읽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친구의 주차 의사를 물어봤던 건, 친구가 주차를 완료할 때까지 난 얼마든 더 기다려줄 수 있었고 해내고 싶어 하는 친구의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리라는 발렛 주차 요원 말에 냅다 내리는 건, 주차를 위해 애쓰고 있는 친구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이 날 나의 스캐너 덕분에 아끼는 친구에게 작은 배려를 해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스캐너를 받아들인 뒤로, 이런 경험들을 일기장에 모으며 점차 스캐너의 순기능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창 스캐너의 고성능 때문에 괴로워하고,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 정도로 섬세한 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때, 심리 상담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효인 씨가 그렇게 섬세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도 선생님의 이 문장을 마음의 알약으로 가지고 있다. 타인을 신경 쓰느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고, 가끔 자괴감에 마음이 힘들 때면 저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이 스캐너 덕분에 내가 가사를 쓸 수 있는 거라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거라며 스스로를 토닥인다. 나와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나의 특성은 실제로 작사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나의 고성능 스캐너와, 섬세한 나 자신을 이제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난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