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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가 신효인 Dec 23. 2021

28살이지만, 아직 말이 서툽니다

마냥 멋지지만은 않은, 불완전한 어른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싫어했다.


어딘가 늘 어색하고 좀 수상하다며 뒤에서 나를 험담하곤 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친화력을 타고나질 못한 데다가, 능숙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나누며 알아가고 친해지는 게 일반적인데, 나는 타인에게 '나'를 말로 잘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내 마음은 어떤지, 그때 왜 그랬는지 등 '나'를 이야기하는 걸 오래전부터 어려워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다 꺼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말하려 하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내 마음을 내가 잘 모를 때도 있고, 믿고 속 이야기를 해도 될 상대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고, 말한다고 온전하게 잘 전달될까 싶기도 하고, 말은 오해를 낳기 딱 좋은 것 같고, 내 이야기를 듣는 상대의 반응도 신경이 쓰여 고장 나곤 했다. 그렇게 어색하게 입을 닫은 내가 사람들은 꽤나 수상해 보였나 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는 매-우 입체적이고 복잡한 사람이다. 아주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사람들과 활발하게 잘 어울리기도 하고, 일할 때는 대담함도 상당하다. 또 위가 작아 평소에는 적은 양을 먹지만 좋아하는 음식이나 먹고 싶었던 음식은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더 먹기도 한다. 이 중에서 어떤 '나'를 꺼내 이야기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 모습도 나고, 이 모습과 전혀 다른 저 모습도 나인데. 스스로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게 너무나 어렵다. 그리고 나는 어떤 결정을 하기까지 수많은 생각 프로세스와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거친다. 그런 내게 누군가 결정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면, 일장연설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긴 설명 보다, 이해하기 쉬운 간단명료한 답을 좋아하는 듯했다. 입체적인 나의 모습 중에서 어떤 '나'를 이야기할지, 일장연설을 한 문장으로 어떻게 줄일지 고민하는 시간을 사람들은 보통 충분히 기다려주지 못했다. 입을 쉽게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 대신 멋쩍게 웃어넘기는 게 어느 정도 습관이 됐다.


어쩌다 내 이야기를 하게 될 때는,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어서 무척이나 애를 쓴다. 단편만 전달되는 바람에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도 싫고, 단어 선택 실수로 뉘앙스가 달라져 오해가 생기는 건 더더욱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 밖으로 꺼내는 한 자, 한 자에 최대한 신중을 기한다. 고민 끝에 어떤 '나'를 이야기할지 겨우 골랐는데,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어서 머릿속에서 여러 작업까지 거치니, 그 결과는 뻔하다. 말할 차례가 될 때마다 버퍼링이 심하게 걸리는 나 때문에 대화 속에는 수많은 공백이 생겨버리고,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질 못한다. 그 버퍼링을 줄이려 무리해서 말하다가는, 자기 전에 이불킥을 백번쯤 하게 되는 흑역사를 쓰게 된다.


말할 때 이런 나는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고, 꿍꿍이가 있어 보였을 거다. 사람들은 그런 날 불편해했고, 난 점점 더 말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악순환이었다. 이런 경험을 수차례 하면서  타인 민감성이 높고, 말이 서툰 어른이 되어버렸다.


말이 어렵고 혼자가 편한 나는, 사람 대신 일기장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기장은 자신의 페이지를 내가 필요한 만큼 양껏 내어주고, 할 말을 고민하고 다 마칠 때까지 재촉 없이 기다려주었다. 이미 적은 말을 수정하고 싶어 할 때도, 일기장은 내게 한없이 너그럽다. 그 덕분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하고 솔직하게 일기장에 나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읽어보면 유치하기도, 변덕스럽기도, 예쁘지 않기도 하지만, 그게 '나'다. 제일 나답다. 마냥 멋지지만은 않은, 아직 불완전한 어른.


일기장은 그런 나를 평가하지 않고,
핀잔주지 않는다.


나의 소중한 보물이자,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


그리고 일기장에 마음을 적으면서 '나'와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 이때 내 감정이 그랬구나.' 혹은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며 나 자신을 섬세하게 알아갔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을 내가 알아주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내 마음을 살피고, 내 편이 되어주는 건 가장 큰 위로와 공감과 사랑이었다. 정말 든든하고 힘이 되었다. 이걸 느끼고 나니,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예전의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이 알아주길 바라기보다는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더라면 당시에 조금이라도 덜 외롭고, 덜 초조하고, 덜 불안하고, 덜 혼란스러웠을 텐데' 싶어서.


내 맘을 이해하는 작업인 일기 덕분에 내면이 조금씩 자라고 단단해지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난 여전히 말이 서툴고, 사람을 만나는 걸 어려워한다. 그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일기를 쓰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 말실수를 하거나 어색하게 말하고 온 날에 자괴감에서 허우적대던 전과 달리, 지금은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서 비교적 빨리 나와, 서툶에도 잘 말하려 부단히 애썼던 나를 내가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오늘도 해냈다고, 조금씩 더 잘하고 있다고 일기장을 통해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28살이지만, 여전히 말이 서툰 나는 '글'이 편하다.

'' 나를 충분히 기다려주고,
내가 충분히 수정하도록 허락해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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