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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 Nov 26. 2021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 수험생이 브런치 작가가 된 이유

#수험생활 4

1. 초등학생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이었다. 국어는 읽기와 쓰기, 말하기와 듣기로 나뉘는데, 특히 쓰기와 말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아마도 선생님께 첫 칭찬을 받았던 것이 바로 국어시간인 덕분일 것이다(내 기억 속의 첫 번째 칭찬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동시를 암송하는 것을 숙제로 내주신 후 수업시간에 ‘자발적으로’ 손을 들고 암송을 하도록 하셨다. 용감했던 두어 명의 반 친구들이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가며 암송을 했으나, 누구 하나 끝을 맺지 못하고 자리에 앉던 참이었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손을 번쩍 들고 시 암송을 시작하였다. 전날 엄마와 함께 열심히 외웠던 것을 가슴에 묻어두기가 아쉬웠나 보다. 길이가 긴 시는 아니었지만 시의 마지막 행까지 입 밖으로 뱉어내고 나니 선생님과 반 친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대학생 때에는 국어국문학 복수전공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관련 수업을 꽤나 많이 수강하였다. 물론 책벌레와 타고난 글쟁이가 많은 국어국문학과 학생들 사이에서 나의 학점은 처참했지만(그래서 결국 복수전공은 포기하였다.) 문법과 어법, 글쓰기, 문학 작품 해석 등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배웠다.




2.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갈 때 담임 선생님뿐만 아니라 반 친구들도 그대로였는데, 왜 그렇게 했는지, 우리 학교만 그랬는지, 그 이후엔 왜 또 반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글쓰기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해 주신 나의 담임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방과 후 교실로 논술 수업을 개설하신 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논술 수업을 듣게 되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친구는 전국 백일장 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나게 글을 잘 쓰는 친구이었는데, 도대체 나에게 어떠한 이유에서 논술 수업을 듣도록 하셨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선생님의 수업방식이 독특했다는 점이다. 보통의 논술 수업은 문제 현상이 나타나 있는 글감을 읽게 한 후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논점에 대한 찬반을 선택한 후 근거를 제시하는 글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와 달리 선생님께서는 아주 긴 동화를 매 시간 조금씩 나누어 읽어주신 후(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 보여주기도 하셨다.) 내용을 요약하게 하거나 이후에 벌어질 사건을 상상하여 쓰게 하셨다. 물론 내가 사춘기 이후 받은 논술, 글쓰기 수업과 달리 초등학생 정도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 방식의 일종일 수도 있다. 그래도 2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무슨 내용의 동화를 읽어주셨는지(아주 길고 독특한 내용의 이야기였는데, 선생님께서 창작한 것인지 새삼 궁금하다.), 어느 정도 크기의 원고지를 썼는지 등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니 아주 훌륭한 수업법이었던 것 같다.


5학년이 되어서 담임 선생님이 바뀌고 난 후 서울 외곽에 있는 선생님 댁에 두 명의 친구와 놀러 가기도 하였다. 선생님 댁에서는 산이 보였고, 우리는 그곳으로 산책을 갔었다. 푸른 배경을 뒤로하고 따가운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선생님은 가을 햇살처럼 따스한 분이었다. 선생님을 좋아해서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3. 나는 수능을 두 번 보았다. 즉, 스무 살에 재수생활을 하였다. 6월과 9월에 치러지는 교육과정 평가원 모의고사(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수능 출제 기관에서 관리하는 모의고사라서 문제의 퀄리티와 난이도가 가장 신뢰받는 모의고사였다.)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 흡족한 성적을 받고 내심 수능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험 전 날 잠을 못 이루고 긴장을 잔뜩 한 탓인지, 1교시 언어영역 시간에 누군가 켜놓은 알람 때문인지 수능을 망쳤다.


그리고 급하게 2-2 수시를 준비하였다(2학기에 진행되는 수시 전형이지만 수능 이후에 논술시험을 보고 수능 최저등급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격할 수 있어서 2-2 수시라고 하였다.). 수능시험일 이후 2주밖에 시간이 없었고, 동일한 날에 오전, 오후 두 학교에서 논술시험을 봐야 해서 자신이 없었다. 두 학교 간 거리가 멀어서 오후에 응시하는 학교 근처 분식점에 엄마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내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점심을 먹을 수 있게 주문을 해주셨다(학교 근처 음식점에 자리 잡는 것부터가 전쟁이었다고 한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응시한 오후 논술시험은 너무 힘이 들어 막판에는 눈물을 흘리며 썼다.

그러나 다른 날에 응시한 학교는 떨어지고 한 날에 응시한 두 학교는 모두 합격했다.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글을 잘 쓰는 아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4. 대학교 4학년, 법학전문대학원 입시 준비하였다. 그때 수강했던 수업에서 내 인생의 멘토이자 영원한 스승인 교수님을 만났다. 준비하던 입시에서 실패하고 가슴에 물풍선을 품고 있던 나는 누군가 툭 건드리면 톡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나는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20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지만, 따로 교수님께 질문을 하거나 상담을 요청하는 살가운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것은 바로 교수님이셨다. 교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내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아주셨다. 나중에 말씀해주셨지만 교수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세상에 모든 짐을 짊어지고 있는 듯이 버거워 보였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꼭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제출한 과제에서, 이후에 보여드린 자기소개서를 통해서 교수님은 내 글이 독자로 하여금 읽기 쉽게 쓰였다는 칭찬을 해주셨다. 화려한 문체나 강한 힘이 느껴지는 필력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내 글이 좋다고 하셨다. 내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한 교수님의 처방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그때, 교내 글쓰기센터 센터장이셨던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의 연락을 받았다. 전공수업에 제출한 소논문을 읽어 보시고 연구자료로 활용해도 되는지 동의를 구하는 전화였다. 전공별 글쓰기에 대하여 연구 중이신데, 내가 쓴 소논문이 법학 글쓰기의 우수 사례로 꼽힌 것이다. 덕분에 나는 국어국문학과 교수님께 1:1 글쓰기 코칭을 받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그렇게 글쓰기에 자신감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의 멘토인 교수님께서는 입시 준비나 내 삶의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꼭 글로 남겨놓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감정을 잘 표현하는 섬세함과 다른 이들의 감정을 잘 헤아리는 공감능력이 내 글의 매력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5. 서른이 넘어 공인노무사 수험생활을 시작하였다. 1차 시험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응시하였고, 경험 삼아 본 2차 시험에서(2차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다.)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준비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전업 수험생활을 하는 나를 남자 친구가 기다려줄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었지만, 부모님과 남자 친구에게 퇴사 후 전업 수험생활을 할 계획을 말씀드렸다.


나는 입시와 수험생활로 20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님은 늘 마음고생을 하셨고,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1차 시험도 몰래 보았다. 예상대로 부모님은 결혼을 할 나이에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또 공부를 한다고 하니 걱정부터 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결국 나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주시고, 응원해주셨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때에 남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철저하게 계획적인 나에게 그 시기는 결혼을 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본격적인 전업 수험생활을 시작하려던 때에 갑자기 결혼이라니. 하지만 시험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남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닐 정도로 남자 친구를 사랑했고 내 인생의 동반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그 계획을 조금… 아니 많이… 앞당겨서 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프로포즈를 받았던 추억의 장소 / 눈물로 눈이 팅팅 부어버린 그 날 가장 잘 나온 사진

수험생이 공부에만 집중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한 가지에 몰두하다 보면 내가 쓴 시간과 노력, 마음에 대한 대가를 보상받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드시 합격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공부시간이 확보되어야 하기에 늘 공부시간에 집착하게 되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점점 예민해졌다. 결혼을 하고 나니 이런 나를 지켜보는 가족들이 더 많아졌고, 함께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특히 엄마는 항상 공부에 묶여 있는 나를 안쓰러워하셨다. 그리고 수험생을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을 알고 있으셨으므로, 결혼 후 2년간의 수험생활을 뒷바라지하는 사위가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다. 나 역시 올해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고 나니 수험생활이 버겁게 느껴졌고, 코로나 후유증으로 골골대는 남편이 퇴근 후에도 TV조차 마음껏 보지 못하고 거실 한편에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인가 싶은 회의감이 들기도 하였다. 공부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만 딸에게 전화를 하셨던 엄마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 나쁜 딸인 것만 같았다.


남편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교수님께서 글을 써볼 것을 권유하셨는데, 남편도 이를 기억하고 있다가 내게 글을 써볼 것을 추천하였다. 앞으로 수험생활을 계속하게 되더라도 글쓰기는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정적인 활동으로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나의 생활과 감정을 글로 남기면서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역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그렇게 교수님께서 글쓰기를 말씀하신 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6. 올해 내게 닥친 일들이 버겁게 느껴진 이유는 결국 정보가 부족해서였다.


우리가 어떤 집을 원하는지부터 리모델링 공정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떤 업체와 어느 정도 비용을 들여야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올지 등등 리모델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시간을 들여 찾아보고 발품 팔아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에 더하여 선택지를 직접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고생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전문가인 업체 대표님과 디자이너님이 선택지를 좁혀주면 거기서 선택하면 되는데 왜 모든 것을 다 직접 찾아보는 고생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 말이 맞았다. 내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부분은 결국 전문가의 추천을 받았고(특히 조명 펜던트는 찾아보고 싶어도 어떤 디자인이 어울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생활치료센터에 무엇이 구비되어 있고 어떤 것을 반입한 후 다시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저질환이 있거나 고령자만 가는 줄 알았던 병원으로 남편이 가게 되었을 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두려웠다. 퇴원 후 겪었던 부작용들도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으니 매일 몸 상태를 예민하게 살펴보게 되고 걱정이 점점 커져만 갔다.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준 몇몇 분들 덕분에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는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거나 의료진 및 지원팀 선생님들께 물음표 살인마로 낙인찍히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특히 코로나 시국 2년 차를 지나 곧 3년 차로 접어들려는 이때에 아직도 코로나 관련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코로나’ 관련 키워드를 검색해서 유입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직 사람들과 소통할 여유는 없지만(부족한 내 글을 읽어주시는 감사한 작가님들의 글을 몰래 훔쳐보고(?) 오는 정도밖에 못하고 있다.) 과거의 나처럼 정보가 없어 막막해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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