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4
나는 아동복 매장 VIP 고객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 어찌나 아동복 매장을 자주 들락날락했던지, 판매원 선생님이 얼굴을 기억했다가 각종 사은품과 샘플을 챙겨주셨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친구들이 아기를 낳았고, 그보다 더 일찍 결혼을 한 수봉이는 벌써 둘째 공주님을 뱃속에 품었다.
특히 내돈내산으로 얻기 부담스러운 가디건을 사주면 반응이 뜨거웠다. 자주 세탁을 해야 하므로 관리가 쉬운 옷에 손이 가고, 아기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싼 옷을 사기가 아깝기 때문일 것이다. 수봉이네 가족사진 속 첫째 왕자님, 써니네 가족 꽃놀이 사진 속 공주님 모두 내가 선물한 가디건을 입고 있다.
특별히 아이를 좋아해서 아동복 매장에 출근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아이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길거리에서 아이를 보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면서 너무 귀엽고 예쁘다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에게는 인사성 바른 아이가 먼저 인사를 하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저 아기의 표정, 행동에서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여서, 그리고 내 친구들이 사랑하는 존재이니까 나도 조카들을 예뻐할 뿐이다.
결혼 4년 차,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질문이다. 다행히 시댁에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시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마음이 급한 친정 엄마나 남편처럼 늦둥이로 태어나신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결혼을 계획하고 있거나 이미 결혼한 친구들이 한 번씩 물어보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딩크족은 아니다. 남편과 나는 성격이나 성향이 완전히 다르면서도 가치관이 잘 맞는다. 남편도 나처럼 아이를 꼭 낳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아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리고 2세 계획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 계획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 말한다. 아무래도 수험생활 중에 결혼을 했으니 최대한 내 뜻을 존중해주려는 것 같다.
하지만 결혼하고 2년이 지나도 수험생활이 끝나지 않았고, 금기어처럼 취급되던 2세 계획은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걱정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친정 엄마는 시부모님이 말씀은 못하셔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시겠냐면서
“아기는 엄마가 봐줄 테니까 넌 아기 낳고 공부해.”
라고 말했고,
교수님께서도
“로스쿨 재학 중에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힘들겠지만 아이가 있어도 공부는 계속할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아기가 찾아오면 받아들이렴.”
라고 말씀하셨다.
친정 엄마가 아이를 봐준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없을 때와 있을 때 내가 공부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은 천지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이후 엄마에게 찾아온 건강 이상이나 여러 사건들은 아이를 맡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없는 지금도 공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집안 살림도 해야 하고(이래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을 때 편하게 공부하라는 거구나 하고 절감 중이다.), 연세가 있으신 시부모님도 자주 들여다보아야 한다. 1차 시험 직전에는 시어머님이 수술을 하시고 2주간 병원에 계셨지만, 지금은 퇴원 후 집에서 회복 중이시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국도 한가득 끓이고, 반찬 두어 가지를 하고, 과일도 깎아서 갖다 드렸다. 일주일에 3일은 학원에 묶여있어서 이 이상으로 하는 것은 나에게도 무리이고, 시부모님도 부담스러워하실 것이다.
아이가 있었다면 이 정도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꼭 시부모님이나 친정 식구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분명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제일 먼저 포기하는 것은 공부가 될 것이라는 무서운 예감이 든다.
남편 주변에도 아이가 있는 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친구들을 만나고 온 다음 날, 미용실에 가는 길에 남편이 말을 꺼냈다.
“난자 냉동은 어릴수록 좋다는데... 나중에 아이가 아프면 내가 늦은 나이에 낳아서 건강하지 못한가 죄책감이 든대.”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합리화시켜도 가장 마음이 급한 사람은 나였다. 요즘 조카 손주들이 태어나면서 아이들 사진을 보는 낙으로 지내시는 시부모님을 보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가끔 내게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시면 그렇게 마음이 불편할 수가 없었다.
“써니도 그렇고 주변 친구들 보면 조리원에서 아직 우리가 막내라고 하거든? 아직 노산 아니야. 그리고 난 지금이 제일 건강상태가 안 좋아. 오히려 몇 년 뒤가 더 건강할 거 같은데!!!”
내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남편은 하던 이야기를 멈췄다.
그날 이후에도 종종 2세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한다. 남편은 구체적인 마지노선까지 못 박았다. 마흔이 되기 전에는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남편보다 두 살 어린 내 나이 기준으로 하면 안 되냐고 몇 번 이야기했지만 꼭 ‘본인’ 기준으로 마흔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기어이 남편 입에서 이 말을 듣고 말았다.
“햇님아, 네가 마흔이면 우리 부모님 안 계셔.”
올해도 시험에 떨어지면 2세 계획부터 세우자고 큰소리로 대답을 했지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남편이 저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남편은 성격이 급하고 생각이 많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고 다독여주었고, 묵묵하게 나를 믿고 기다려준다. 하지만 그런 남편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생각보다 많은 수험생들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부를 하고 있거나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여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한다.
하지만 그러한 축복이 어느 순간부터 부담이 되었다. 내 마음속에 불편함 내지는 죄책감이 점점 커지고 있는 탓이다. 남편도 마음이 급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남편, 야 너두...? 나두...!
우리 부부는 이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