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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 Mar 10. 2022

30대의 터널엔 비상구조차 없다 (5)

#수험생활 10

대학 입시에서 재수를 하면서 대학 입학이 남들보다 늦었지만, 과정이 어찌 됐건 취업은 또래 중에도 빠르게 한 편이었고, 결혼도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사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시기에 했다. 그 과정 속에서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었다. 내가 노무사가 되기만 한다면, 다른 노무사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나만의 강점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서 계속 이직을 하거나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들 혹은 현재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또 다른 경력경로를 계획하는 사람들보다 앞서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속도가 다 다르다고 믿어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멘탈이 갑이다." 혹은 "넌 정말 '긍정이'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SNS를 일부로 하지 않았고 동창회 등의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이나 가까운 지인 외의 소식에 덜 노출되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거나 건너 건너 지인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될 때에는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결혼 후 첫 2차 시험은 준비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합격을 기대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자꾸 조급해졌다. 가끔 채용공고를 들여다보고, 상대적으로 업무 강도가 낮은 계약직이나 시간선택제에 지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단호하게 말했다.

"일하면서 공부하게 되면 공부시간이 부족해서, 업무나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거야. 그래서 퇴사하고 공부하는 거 아니었어? 다른 선택지는 없어. 합격할 때까지 공부하고 합격하는 것밖에는."




#30대의 터널엔 비상구조차 없다, 하지만


불합격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합격자 발표날에는 남편 회사 근처에 찾아가 같이 점심을 먹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불합격 소식을 알렸다.



신혼집은 학원과 가까워서 통학시간 걱정 없이 학원 실강을 들으며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터졌고, 학원들은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환하였다. 학원에서 실강을 듣는 실익은 

1. 스스로 자기 통제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모의고사를 보고 강의를 듣게 만드는 강제성이 부여된다는 것이며,

2. 다른 수험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는지 직접 보면서 동기부여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3. 실제 시험장과 유사한 분위기에서 매주 모의고사를 보고,

4. 응시생 평균과 나의 등수를 확인하며 상대적 위치를 확인할  있으며,

5. 내가  답안을 강사나 노무사에게 첨삭을 받을  있다는 점에서 많은 수험생들이 지방에서 굳이 서울로 올라와서 학원을 다닌다.

그래서 그런지 학원 강의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학원들은 '온라인 첨삭'이라는 시스템을 활성화시켰다. 정해진 시간에 문제를 공개하고, 기한 내에 답안을 스캔하여 제출하면, 답안지를 첨삭해서 돌려준다.

나에게는 오히려 코로나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공부를 하는 편이라서 실강의 강제성이 필요가 없었고, 그 해에는 1차 시험부터 다시 응시해야 했으므로 별도의 동기부여가 없어도 시간에 쫓겨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밖순이인 나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집 안에만 있는 것을 못 참았는데, 코로나에 감염되어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면 나에게 '잃어버린 1년'이 생기게 되므로 잘 참고 집 안에만 콕 박혀있었다.


때마침 남편의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내 생활도 함께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남편이 일어나는 시간에 함께 일어나고, 점심식사도 든든히 챙겨 먹었으며, 시험을 볼 때에는 남편이 감독관 역할도 해주었다(시험 종료시간에 와서 이제 그만 쓰라고 감독관 연기를 했다. 하지만 가끔 5분 정도 시간이 초과되어도 답안지를 빼앗아가지는 않았다. 참 너그러운 감독관이었다.).

내가 만든 왕김밥 / 남편이 만든 치킨마요덮밥


한 번씩 실강이 다시 재개되기도 하였다. GS2기가 시작되는 4월부터는 매주 모의고사를 실시하는데, 시험을 보고 난 후 다음 주에는 강의실 뒤편에 모의고사 응시생들의 등수를 붙여둔다. 나는 평균적으로 등수가 괜찮게 나왔다. 물론 논점 일탈을 하거나 부실하게 쓴 주제가 있으면 등수가 떨어져서 시무룩한 날들도 있었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지만 않으면 합격할 거야."

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등수가 잘 나와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답안지 마지막에 '이하 여백'(답안 작성이 여기에서 끝났으니 더 이상 뒷장을 펼쳐보지 않아도 된다고 채점자에게 알려주는 표시이다.)을 쓰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또 불합격이었다.

부수적 쟁점을 논하지 못한 문제도 있었고, 법 조문을 제대로 찾지 못해 결론을 다르게 낸 문제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놓고도 딱 그 정도의 답안을 썼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공부방법이 잘못되었던 건지, 내 문제 해결 능력이 부족한 건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1차 시험에 합격을 한 덕분에 다음 해 2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고, 남편은 1차 시험을 안 봐도 되니 분명 내년에는 합격할 것이라고 격려해주었다. 합격점에서 소수점 차이로 떨어졌으니 조금만 더 하면 될 것이라며.




1차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학습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내가 수강했던 강사들을 대부분 바꿨다. 특 A급으로 다루는 중요 쟁점은 노무사 수험가에서 모든 강사가 중요하게 가르치지만, 그 외의 쟁점들은 강사마다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고, 답안에 현출해야 하는 판례의 요점도 다르게 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습의 폭을 넓히면 놓치는 쟁점도 줄어들고, 보다 많은 쟁점들을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닥치면서 오히려 시간에 쫓겨 공부를 하게 되었다. 코로나 감염과 리모델링, 그리고 이사. 바로 작년의 일들이다. 3월부터 리모델링 자료를 찾아보고 업체를 선정하여야 했고, 4월에는 선정된 리모델링 업체와 미팅을 하면서 각종 자재나 가전, 가구를 보러 다녔다. 그리고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한 5월, 우리 부부는 코로나에 걸렸다. 격리 해제가 되고 6월에는 공사 현장을 수시로 방문하며 업체와 미팅을 했고, 7월에 드디어 이사를 했다. 2차 시험은 8월에 있었다.

생활치료센터에서 나오자마자 찍은 사진 / 학원에 다녀오니 갈곳 잃은 짐들이 널부러져있던 이삿날

코로나에 걸리고 난 후에도 리모델링과 이사로 쉴 새가 없었고, 시험일이 가까워 올 수록 소화해야 하는 공부량이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시험 직전에는 약이 없으면 책상에 앉아있기 힘들 만큼 체력이 약해져 있었다. 어느새 내 공부방향은 학습의 폭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일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네 번째 불합격을 확인하였다. 몸과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는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선택지가 없다. 간간히 헤드헌터나 인사담당자 등에게 연락이 왔었는데, 30대 중반에 들어서니 그런 연락도 뚝 끊겼다. 경력이 제대로 단절되었으니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내세우기도 힘들어졌다는 의미이다. 대학 졸업예정자나 갓 졸업한 20대 친구들이 취업시장에 많은데 회사가 굳이 날 채용할까?



30대의 터널엔 비상구조차 없다, 하지만 나는 과연 이 터널의 길을 끝까지 따라간 적이 있었을까?


취업이라도 하려면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나는 늘 터널 중간 어디쯤에 있는 비상구로 '취업'을 찾았다. 수험생활을 털고 나가는 것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터널을 끝까지 가는 것보단 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저 터널의 끝이 터널을 탈출할 수 있는 바깥세상과 연결되어 있는지, 결국에는 터널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소수점 차 탈락이라 아쉬워서, 다음에는 될 것 같아서 한번 더, 또 한 번만 더 하면서 이어진 수험생활은 어느새 나를 장수생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이 터널의 끝을 보려고 한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말처럼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꼭 해낼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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