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저녁엔 '무한도전' 보고 두근거렸고,
밤엔 '그것이 알고싶다' 보고 두근거렸다.
같은 두근거림이지만, 너무 다른 종류의 박동이었고.
'그알'은 이렇게 가벼운 감상으로 끄적거릴 내용이 아니니까
여기에서는 얘기하지 않는 걸로.
그래서 '무한도전' 얘기 할 거다.
'무한도전'을 보는데, 내가 엄청나게 옛날 사람이 된 것 같고 그랬다.
1996년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나는 이 때부터 엄마 말을 드럽게 안 듣기 시작했다. 정말 드럽게 안 듣고, 신이 축복처럼 내려준 말발을 엄마하고 말싸움에 썼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 소진돼 버렸다.)
중1 말에 H.O.T가 데뷔했다.
이때 H.O.T 안 좋아하면 대화에 낄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나는 딱히 팬심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두텁지 않은 사람이라
분위기에 휩쓸려서 좋아하는 '척'을 했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젝키가 데뷔했다.
마음은 젝키에 가 있지만, 친구들이 모두 H.O.T 팬인지라
선뜻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마음앓이를 하다 진실게임을 할 때 겨우 털어놓는 아이들이 있었다.
진짜로.
지금에 비하면 그 때는 팬질이라는 것이 매우 한정적이라서
-엽서나 사진을 산다.
-라디오에 출연하면 녹음을 한다.
-TV에 나오면 녹화를 한다.
-팬레터 또는 편지를 보낸다.
-집 앞에 찾아간다.
-스케줄은 사서함을 확인.
이 정도가 전부였다. 이것만으로도 어찌나 분주했는지.
그리고 그 때는
다이어리라는 것이 있었는데
예쁜 속지를 사서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예쁘게 써달라고 한 후
하루나 이틀 후 회수해 다이어리에 차곡차곡 쟁여놨다.
꾸미는 건 고사하고 글씨도 못 썼던 사람으로서(잘하는 게 없음 ㅠ)
손재주 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용은 대부분 좋아하는 그룹, 멤버에 관한 것이었다.
속지를 받을 사람이 H.O.T 팬이라면
"희준 오빠하고 100일 축하해"라는 뜬금없는 내용.
젝키 팬이면 "지원 부인 ㅇㅇ"으로 부르고 하는 식이었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밤에 녹음한 라디오 테이프를 돌려 듣고
(워크맨으로, 이어폰 한쪽씩 나눠끼고)
품앗이로 녹화한 방송 출연 테이프를 선생님 몰래 돌려보곤 했다.
(이건 그나마 최신식 시설이 구비된 학교에서나 가능)
오빠를 만나려면 집 앞에 찾아가는 방법 밖에 없었고.
그래서 콘서트라든가 공개방송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MP3는 고사하고 CD 플레이어도 귀하던 시절 ㅋㅋ
앨범을 사면 주는 브로마이드를 받으려고
발매 당일에 선생님 몰래 나갔다가 (담 넘어 나갔다가 들켜서) 정학이 될 뻔도 했고
오빠하고 친한 걸그룹 멤버들을 죽을만큼 싫어하고 저주하면서
얼른 가요계 은퇴하라고 욕을 했었다.
(그래서 박지윤과 간미연에게 남모를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다. 언니들 미안해요.)
한 번은 젝키를 미친듯 싫어했던
H.O.T 팬 친구들 덕분에 또는 때문에
젝키 사무실로 협박 편지도 보냈다.
(이 열정으로 공부를 했으면..아니 연애를 했으면..)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릴 때도 마음이 약했고, 소심했어서
들어가라. 나오지 마라. H.O.T가 최고다 이런 순둥순둥한 얘기만 했다.
지금 연예기획사와 접촉이 많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입장에서
얼마나 가소로웠을까.......싶다.
정작 그 뻘건색 투성이 편지를 봤어야 할 젝키는 그런 게 존재했는지도 몰랐을 거다.
(정말 다행이다.)
밤 늦게까지 통화를 하면서 오늘 오빠들 방송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몹시 진지하고 신중하며 신랄하며 주관적이고 맹목적인 모니터)
"나중에 꼭 오빠 같은 사람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도 하겠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에는 항상 "내일 자세히 얘기하자"고 마무리했던 그 통화들.
암튼 귀여웠다.
아직도 책상 서랍 뒤지면 그 때 주고 받았던
오빠들 사진으로 만든 엽서가 나오는데
편지 마무리는 늘 '우리우정 포에버'였다.
그 친구들은
이제 결혼을 했고, 애도 낳았고, 이민을 가기도 했고, 연락이 끊어지기도 했다.
그냥 이런 옛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보송보송해지는 기분이라.
아, 추억이 좋은 거구나. 싶다.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좋은 추억 선물해준 오빠들도 행복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바로 지금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당장 내일 출근을 해야하는 빡빡한 일상을 살고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