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왔다.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채로 상암동 사무실로 출근했다. 축축한 공기가 일상으로의 복귀를 알려줬다. 사무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부장이 엄청난 서류철들을 가져와 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잘 다녀왔나?”
“깜짝이야. 부장님. 일찍 오셨네요? 아,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셨죠?
“하하, 힘이 넘치나 보구만. 푹 쉬고 왔으니 열심히 일 해야겠지?”
콧잔등을 찡긋 거리며 웃는 모습을 아침에 보니... 기분이 확 상했다. 이건 기계적인 매일이 시작될 것이라는 사인이었기 때문이다. 샌디에고에서 보냈던 며칠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로맨틱한 일탈과 일상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오늘 아침 출근하는 내내 달콤한 흔적을 털어내지 못해 허우적대던 나는, 부장의 찡긋거리는 콧잔등을 보며 체념하게 됐다.
그렇게 벌써 2주가 흘렀다. 한국에 온 후에도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매일 야근이 이어지고 있었다. 밤 9시 전에 회사 문을 나선 적이 없을 정도로. 어쩌다 7시쯤 사무실 컴퓨터 전원을 끄고 나오면 횡재라도 한 기분이 들어서 쉽게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나라에서 퇴근시간은 중요하지 않았지만 출근시간은 중요했다. 일개 사원들에게는 불공평하고, 회사 간부들에게는 매우 합리적인 출퇴근 시스템. 벌써 나는 지쳐 있었다. 오늘도 시계는 벌써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눅눅해진 여름 공기는 온 몸을 끈적거리게 만들었다. 길에서는 술에 취한 회사원 무리가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몸을 포갠 이들은 회사의 빌어먹을 것들에 대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성토하기 바빴다. 마음 속으로만 그들의 심정에 공감하며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기름이 껴 찐득하게 굳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정류장 광고판에 지친 얼굴이 반사돼 비쳤다. 내 얼굴인가 싶어 다시 한 번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찌들어 있었다. 집에 가서 푹 자고 일어난다고 해도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은 피로다. 한 달 전 쯤에 냉장고에 넣어뒀던 팩이라도 꺼내서 올려놓고 자야지 생각했다.
시끌벅적한 거리를 등지고 휴대폰을 꺼내 회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문자와 SNS 메시지를 넘겨봤다. 회사일을 하느라 대답하지 못했던 지인들의 연락에 뒤늦게 답하며 반가운 체를 했다. 엄마는 집에는 언제 올 거냐고 채근을 했고, 최근 신혼집 정리를 마친 친구는 집들이를 하겠다고 했다.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인정이었다.
“나 취업했다.”
인정은 몇 주 전 나를 생면부지의 샌디에고 한복판에서 헤매게 만들었던 그 뉴욕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내 감정에 취해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은 인정의 이야기에 제대로 맞장구 한 번 쳐주지 않고 돌아온 나를 탓하던 차에 희소식이었다. 고생 끝에 드디어 수확을 거두는구나 싶었다. 사람은 다 때가 있다는 어른들 이야기는 맞는 말이었다.
인정은 그토록 갈망해왔던 디자이너로, 그것도 세계 디자인 산업의 중심이라는 뉴욕에서 첫 발을 떼게 됐다. 회사 스트레스가 잊혀질 만큼 대단히 기쁜 소식이었다.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축하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또 다른 메시지를 들어왔다. 새하얀 그림? 아니, 사진 한 장이다.
“안녕? 한국은 어때? 난 네가 보고 싶어했던 아이슬랜드에 와 있어. 정말 춥지만 풍경은 내가 여태까지 본 것 중 최고야. 그리고 나 다음 달 쯤에 한국에 갈까 해. 내 여행의 마지막이 한국이 될 거야. 멋진 가이드 기대해도 되겠지?”
내가 호스텔에 남기고 온 쪽지를 본걸까? 그렇다면 왜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건지 묻고 싶은 말이 팝콘 기계 속 옥수수알처럼 튀어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로웬이 한국에 오기 때문이다. 로웬이다. 로웬이 한국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