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호스텔 앞이야. 얼른 짐 챙겨서 내려와.”
인정이 돌아왔다. 로웬과 무려 9시간에 걸친 긴 관광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정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금만 늑장을 부렸다면 들어오는 길에 인정을 만날 뻔 했다.
나는 내일 오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인정은 내게 잊지 못할 샌디에고의 밤을 만들어주겠다며 돌아오자마자 차를 끌고 데리러 왔다. 마땅히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인정은 호스텔 주변을 몇 바퀴 째 돌고 있었다.
“얼른 나와. 얼른 얼른. 나 이러다 100만원 짜리 딱지 끊으면 넌 한국에 못 갈 줄 알아.”
인정의 닦달에 풀어놨던 짐을 캐리어에 쓸어 담았다. 빠뜨리는 물건만 없게 하자는 생각으로 이고, 지고, 들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낑낑 거리며 호스텔 문을 열자 인정의 차가 마침 이 쪽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가방에 옷가지들을 우겨넣었던 것처럼, 인정의 차 뒷좌석에 트렁크를 냅다 던져 넣었다.
“나 10분만 들어갔다 올게.”
안 된다는 인정의 고함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호스텔에 들어섰다. 로웬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일 해가 뜰 때까지 자겠다며 들어 간 로웬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지만 ‘혹시’ 모를 운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긴 신호음이 흘렀고, 예상대로 로웬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호스텔 꼭대기 층부터 1층까지 서너번 오르락 내리락 하며 로웬과 통화가 되길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부엌과 휴게실을 차례로 둘러봤지만 그 곳에도 로웬은 없었다. 결국 밖에서 기다리던 인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지금 갈게. 미안 미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정에게는 로웬과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비밀스럽게 우리 둘의 이야기가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로웬과 나 둘 뿐이어야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여행 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로 내 모든 감정이 설명될 것 같았다.
“나 지금 가. 혹시 한국에 오게 되면 연락해 줘. 혹시 오게 된다면 말이야. 그리고 아이슬랜드에 가면 사진 한 장 보내줄 수 있어? 보고 싶어.”
로웬이 아침마다 키친룸에서 커피를 마셨기 때문에 이 곳에 쪽지를 붙여 놓으면 발견할 것 같았다. 부엌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쪽지를 붙이고 돌아 나왔다. 보고 싶다는 말을 지울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남겨놓기로 했다. 내일 아침 로웬이 운 좋게 이 쪽지를 발견하기를, 그리고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어떻게든 답장을 해주길 바랐다.
“미안, 미안.”
호스텔을 나서자 때마침 인정의 차가 코너를 돌아 이 쪽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괜히 크게 웃으며 차문을 열었다.
“야, 너 여기 딱지 한 번 끊으면 얼마를 내야 되는지 알아?”
잔소리를 들으면 일단 인정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신 없이 우겨넣었던 트렁크를 풀었다. 짐을 쌀 때만큼 엉망인 상태였다. 신발을 말아놨던 비닐은 뜯겨 있었고, 기념품으로 샀던 m&m's 봉투는 찢어져 있었다. 그래, 로웬을 만나지 못하고 나온 것부터 찜찜했다.
“옷부터 갈아입어.”
인정이 며칠 전 공항에 입고 나와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옷을 한가득 바닥에 펼쳐놨다.
“옷은 왜?”
“너 설마 그러고 클럽에 가겠다는 건 아니지?”
인정은 복잡한 내 낯빛을 읽지 못하고 평일에도 수십 명이 대기한다는 클럽에 나를 데려갔다. 바닥을 울리는 드럼 소리, 술잔을 부딪히고 서로에게 다가갈 틈을 찾으며 추파를 주고받는 이들 속에서 나는 휴대폰을 꽤 자주 확인했다. 이번 면접이 망가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취업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인정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이 곳의 분위기를 즐겼다.
시원섭섭할 인정의 기분을 맞춰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안했지만 (말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인정이 모른 척 넘어가주길 바랐다. 나는 바에 기대고 서서 미동도 않는 휴대폰을 열었다 닫으며, 또 내 입에는 짜기만 했던 치킨텐더를 몇 입 씹어 먹으며 우울해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애달픈 기억도 없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마치 이별을 선고 받은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멍하게 첫 만남부터 상황을 곱씹어 봤다. 사실 내가 이 친구와 오랜 인연을 이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나는 영어를 못했고, 로웬은 한국어를 못했다. 그리고 로웬과 나는 8살 차이가 났다. 로웬이 아니고 내가 8살이 많았다. 첫날 본의 아니게 그의 여권을 봐버렸다. 나는 로웬의 나이를 알았지만,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대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이 생경한 감정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고민해야 했다. 아직 로웬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휴대폰을 닫고 고개를 드는 타이밍에 맞춰 인정이 숨을 몰아쉬며 내 옆에 섰다.
“좀 마셨어?”
“8살은 너무 어리지?”
인정은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기 애들은 나이 같은 거 크게 신경 안 써. 결혼할 때 돼서야 안다는 애들도 있고. 뭐 케이스바이케이스지.”
우습게도 인정의 말은 큰 위로가 됐다. 인정의 위로 때문에 로웬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대단한 사이가 될 것도 아니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동화 속 해피엔딩이 좀 더 로맨틱한 것처럼. 다만, 그 때 우리가 계속 만났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잠들기 전에 문득, 한밤 중에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갈 때 곱씹으며 위안을 얻을 것이었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