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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 Mar 15. 2016

여행 중입니다(8)

오늘 로웬의 계획은 두 개였다. 올드타운을 둘러보고 라호야 비치에 갔다가 밤에 개슬램프에 가거나, 올드타운에서 리틀 이탈리아, 씨포트 빌리지를 보고 개슬램프를 걷는 것이었다. 난 두 번째를 선택했다. 관광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숙소와 가까운 곳이 좋았다. 리틀 이탈리아, 씨포트 빌리지 모두 걸어서 이동 가능한 곳에 있었다. 키친룸에 준비돼 있던 커피를 한 잔 씩 마시고 숙소를 나섰다.


올드타운을 찾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트램 정류장에서 큰 길을 건너자마자 나오는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 한적하고 조용한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왔을 법한 오래된 목조 건축물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에는 동네잔치가 벌어진 것처럼 떠들썩하다고 어디선가 들었었다.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은 상점이 많았다. 언뜻 보기에도 마트, 커피숍, 음식점 등 모든 가게들의 인테리어가 매우 이국적이었다. 속치마를 풍성하게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하얀색 에이프런을 두른 여인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유치원에 다닐 것 같은 아이들 무리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호텔이라고 적힌 큰 건물 뒤편에는 새끼 당나귀가 줄에 묶인 채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잡화를 파는 가게에 들어서자 로웬이 파란색 드림캐처를 하나 집어 들었다. “좋은 꿈 꾸라고.” 내 팔목에 걸어주고는 손을 잡았다. 낯선 동네니까, 이 정도는 로웬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우리는 급하지 않았다. 두 팔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큰 나무 그늘에 앉았다가, 흔들의자가 놓여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투는 상인들의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짓궂은 동네 꼬마들처럼.


버스 시간표라든가 시계를 보는 일도 없었다. 해가 너무 뜨거우면 근처 카페에 들어갔고, 배가 고프면 작은 식당에서 쉬어갔다. 그렇게 올드타운을 나와 리틀 이탈리아를 거쳐 씨포트 빌리지까지 6시간을 걷고 또 걸었다.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고, 내 손목에는 파란색 드림캐처가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해질 무렵 씨포트 빌리지에 도착했다. 나는 먼저 벤앤제리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다. 더 추워지기 전에 너무 달아서 혀가 녹아버릴 것 같은 이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먹고 싶었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로웬은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캐러멜 시럽이 듬뿍 들어간 아이스크림 하나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벤치를 찾아 앉았다. 북적거리는 한낮의 씨포트 빌리지와는 다른 느낌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한 숟가락을 크게 떠 입에 넣고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은하수가 바다에 쏟아진 것처럼, 지는 해가 쏟아내는 강렬한 빛을 밀어내며 파도가 일렁였다.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로웬은 발 끝으로 내 신발을 툭툭 치면서 씨포트의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그런데 내가 이렇게 하루 종일, 아니, 만난 지 겨우 이틀 만에 말이야. 너는 모를 거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나는 영어를 못하는 편이거든. 너도 잘 알겠지만. 어찌됐든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고.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한 후 갑자기 훅 얼굴이 달아 올랐다.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은 것처럼.


“응.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로웬은 천천히 말했다. 평소보다 좀 더 느리게 말했다. 고개를 들 타이밍이었다. 그럼 그의 장난스러운 눈빛과 마주칠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웃어버리면 좀 전의 부끄러움은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로웬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표정해 보였다. 그 상태로 우리는 서로를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봤다. 웅성이는 주변의 소음도,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자꾸 인상을 쓰게 만들었던 따가운 햇살도 이 순간만큼은 우리를 방해하지 못했다.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우린 서로의 눈빛을 살폈다. 먼저 움직인 건 또 나였다.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 같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다 불쑥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과감했다. 로웬은 내 행동을 예상했던 것처럼 살짝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그는 내 몸짓을 이해하고 함께 움직였다. 어느새 달이 머리 위에 환하게 떠 있었다. 곁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유난스럽지 않게 감정을 나눴다. 처음이라는 서로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인 것처럼 모든 동작에 어색함이라곤 없었다. 두 손으로 허리를, 어깨를, 양 볼을 차례로 감쌌다.


달빛이 우리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라 한국말로 작게 속삭였다.

“너를, 오늘을, 이 밤을 기억할게. 가능한 오랫동안.”
“나도.”

로웬이 대답했다.


“내가 한 말 이해했어?”
“물론.”
“뭐야, 아니지? 거짓말이잖아.”


로웬의 장난에 웃음이 나왔다. 기적처럼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생각하며 화들짝 놀랐던 내가 바보 같아서 나온 웃음이기도 했다. 그대로 로웬의 어깨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던 로웬의 손이 몸 어딘가 닿을 때마다 전기가 흐르는 듯 찌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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