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걸음 Jun 24. 2022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인생은 고통, 그것일는지 모릅니다. 고통은 인생의 사실이외다. 인생의 운명은 고통이외다. 일생을 두고 고병을 깊이 맛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고통을 명확히 사람에게 알리는 데 있습니다. 범인은 고통의 지배를 받고, 천재는 죽음을 가지고 고통을 이겨 내어 영광과 권위를 취해 낼 만한 살 방침을 차립니다. 이는 고통과 퇴락 이상 자기에게 사명이 있는 까닭이외다. 그리하여 최후는 고통 이상의 것을 만들고 맙니다."

p.197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대전의 테미오래에서 나혜석에 관한 작은 전시가 열려 혼자 시간을 보냈다. 대전 관사촌은 나혜석의 남편인 김우영이 나혜석과 이혼 후 잠시 머물렀던 공간이다. 나혜석이 머무른 적 없는 공간이지만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김우영 그리고 나혜석의 이야기가 전시공간을 채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고서 이여서인지 작가의 글이 더 깊이 가슴에 박힌다.  아무도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 주지 않아 스스로 깨지고 부서지며 절박하게 호소했던 그녀의 감정은 지금도 날이 서 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절박했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내 뼈를 긁어내는 고통'이라는 표현은 어떤 마음과 감정으로 쓸 수 있는 글일까.


지금도 종종 여자들이 살기 편해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들이 이토록 대우받았던 시절이 있었냐며 남자들이 불쌍하다는 말도 농담처럼 하곤 한다. 그러나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여전히 편하지도 쉽지도 대우받지도 않는다. 밤늦은 귀갓길은 늘 불안을 안고 걸어야 하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불쾌한 접촉에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사랑과 이별에서도 늘 신체적, 정서적 폭력을 겪는 일도 다반사이다. 오죽하면 안전 이별을 계획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 운동장은 여전히 남성의 자리이고,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은 남편 돈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아줌마라 취급받는다. 가사노동은 대부분이 여성의 몫이고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기적으로 산다. 저녁 설거지는 항상 남편의 일이며, 주말 청소와 분리수거는 남편의 몫이다. 남편이 나의 가사와 돌봄의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남편의 가사 참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당연하게 시키니 이제 남편도 인정한다. "고마운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남편이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하는 것처럼 나도 하루 종일 가사와 돌봄의 노동의 현장에서 퇴근이 필요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초저녁잠을 잔다. 아이를 돌보고 가사노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걸음이 만보를 채운다. 해가지기 시작하면 내 몸도 방전된다. 그 사이 남편은 아이와 조금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재운다. 아이가 잠들면 나를 깨운다. 한 번에 일어나지 않으면 두 번 깨우고 두 번에 일어나지 않으면 세 번 깨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잠시라도 보내야 한다. 쓸데없는 동영상을 보다가 낄낄거리다가, 의미 없이 SNS 창을 새로고침하다가 가만히 음악을 듣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이렇게 아무 글이라도 쓰고 적어야 내가 나를 잃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영갑 사진집 《숲속의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