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夫婦)
나는 한 남자와 결혼해서 '아내'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는 순간 '아내+며느리'라는 두 얼굴의 신분이 되었다. 남편은 그냥 ‘부(夫)’인데, 나는 ‘처(妻)’가 아니라 ‘'부(婦)'라는 신분에 등극했다. 분명, 처(妻)라는 한자가 있는데 왜 굳이 '부(婦)'라는 한자를 선택했을까? 부처(夫妻)라고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부부(夫婦)라는 말을 썼을까? 부부라는 말은 결혼 당사자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남편 집안 눈높이에서 바라본 말이다.
남자의 결혼은 아내를 맞이하는 일이지만, 여자의 결혼은 남편을 맞이하는 일이 아니라 ‘남편 집안’과 결합하는(좋게 말해서 ‘결합’이지 엄중히 따지자면, 남편 집안에 ‘종속’되는 일이다) 일이고, ‘아내이기보다 며느리’가 되는 일이다. 이게 부처(夫妻)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여자는 남편 집안에서는 ‘부(婦)’가 되지만, 아내의 집안에서는 ‘처(妻)’로 변신한다. 妻家, 妻兄, 妻弟, 妻男 이렇게 남편 집안과 분리되어 있을 때는 아내로 대접받는다. 그것도 아내 당사자가 아니라 아내의 가족을 가리킬 때 편의상 써먹을 뿐이다. 이 무슨 해괴한 발상인가! 여자의 결혼은 남자의 결혼과 무게가 달랐던 거다.
부처(夫妻)는 부부(夫婦)보다는 나은 말이지만 이 말도 완성도가 있는 말은 아니다. 夫는 '지아비 부'다. 그럼 '지어미'가 호출돼야 한다. '지어미'라는 뜻을 가진 한자는 뭐가 있을까? [다음] 사전엔 아예 뜨지도 않고, [네이버] 사전을 검색하니까 세 개가 뜬다. 그나마도 한 개는 婦의 간체자라고 나온다. 婦, 媍. 그런데, 둘 다 '며느리 부'자다. 오롯이 '지어미'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다. 이를 어쩐다? 다음사전은 '없음'을 인정한 거고, 네이버사전은 억지로 만들어냈다고 봐야 되나?
설사 해당한자가 있다쳐도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게 아비와 어미가 만나는 일인가? 애도 낳기 전인데 무슨 아비, 어미 타령인가!
‘지어미’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도 방법은 있다. 아내가 호출 됐으니까 '남편'을 호출해 보자. 남편과 아내! 여기서 끝? 아니다. 남편이 호출됐으니 이제 '여편'이 호출될 차례다.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정작 '여편'은 엉뚱한 데서 대접을 받는다.
"야 이 여편네야!"
이렇게 써먹고 싶어서 아껴둔 거였다.
내가 생각하는 원칙은 이거다. '남녀 간에 대응이 되지 않는 호칭, 지칭은 정당성이 없다.' 혹자는 이런 나를 두고 참 피곤하게 산다고 한다. 별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냔다. 돌려차기 하지 않고 "나는 관심 없는데 너는 왜 그런 걸 따져!"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용기는 없었나 보다. 내 안의 나를 표현할 줄 몰라서 상대를 탓하는 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형제자매(兄弟姉妹)
영어에서처럼 그냥 brothers와 sisters이면 복잡해질 일이 없을텐데, 위아래를 따져서 형/제/자/매이다 보니 일관성도 없는 복잡하기만한 지칭을 낳았다. 앞으로 주욱 하나하나 살펴보겠지만 대환장 파티가 예약되어 있다.
형제 : 兄弟 → 맏 형 + 아우 제
자매 : 姉妹 → 손윗누이 자 + 손아랫누이 매
여자는 여자를 ‘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매(姉妹)는 ‘언니 + 여동생’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자매’는 남자 기준에서 ‘누나 + 여동생’ 으로 이루어진 조합을 말한다. 그러니 형제와 자매가 만났다고 해서 형, 언니, 오빠, 누나, 동생이 몽땅 하나로 묶여서 설명이 될 리 없다. 물론, 아들의 입장에서는 성립이 된다. 형제자매라는 말은 '여자 니네는 그런 거 따질 필요 없어!' 이게 반영된 말이다. 형, 언니, 누나, 오빠, 남동생, 여동생의 법칙에 입각해 (형 + 남동생), (형 + 여동생), (누나 + 남동생), (누나 + 여동생), (언니 + 남동생), (언니 + 여동생), (오빠 + 남동생), (오빠 + 여동생), (오빠 + 언니), (형 + 누나), (남동생 + 여동생) 이런 조합들이 성립하지 않는다. 형제자매는 (형 + 남동생), (누나 + 여동생) 이렇게 남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조합만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언니+여동생’ 조합은 ‘형제’처럼 그들만을 위한 지칭이 없다. 우리는 왜 여자끼리도 ‘자매’라고 지칭할까? 자기 자신들조차 자신들의 언어로 바라보지 못하고 타자화해 바라보는 현실, 유령같은 존재로 살아온 세월을 자각하지도 못 했기에 이 나라 여성들의 삶이 진도를 못 나가고 있다. 살아오면서 이런 불만을 토로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여자인 내가 사용하는 말의 범위가 남자의 혓바닥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 땅에 사는 여자들은 답답하지 않은가보다.
남매(男妹)
남매 : 男妹 → 사내 남 + 손아랫누이 매
사내와 손아랫누이로 이루어진 조합. 사내는 독립적인 뜻을 갖지만, 손아랫누이는 특정주체가 있어야 그 주체를 기준으로 의미가 살아난다. 남자의 눈높이에서 ‘누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고, 또 위냐 아래냐를 따져서 이렇게 두 번의 분석을 거쳐야 의미가 와닿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말을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녀 동기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물론, 이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남자의 눈높이에서는 성립하니까. 그렇다고 온전한 지칭도 아니다. 같은 이치로 '누나+남동생'은 '여제'인가? 이런 말 쓰는 사람 봤나? ‘남매’라는 이 어설픈 말은 왜 필요했을까? 사내라는 말은 계집이라는 말과 어울리고, 손아래라는 말은 손위라는 말과 짝이 되는데 이건 도대체 무슨 조합일까? 그냥 아들딸이라고 하면 되는 걸 왜 어울리지도 않는 한자 두 개를 끌어다 붙여서 정체불명의 단어를 탄생시켰을까?
자매(姉妹)
자매 : 姉妹 → 손윗누이 자 + 손아랫누이 매
이 말은 brother의 눈높이에서 누나랑 여동생을 말하는 거지, sister의 눈높이에서 언니랑 여동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여자끼리는 '누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매는 '언니와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와 여동생'을 말하는 거다. '언니와 여동생'은 쉽게 말해서 자기들 이름도 없이 살고 있는 거다.
지금까지 살펴본 형제자매, 남매, 자매에 여성은 없었다. 남성의 눈높이만 반영되어 있다. 여자인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무명씨'였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