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에서 이어집니다.)
귀국 후 이 문제로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한다. 나혜석은 이혼 후 발표한 '이혼고백장'에서 구미 여자들은 남편과의 관계를 잊지 않는 범위내에서 다른 남자와의 관계도 허용된다, 오히려 그런 일이 현재의 배우자와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한다는 얘기를 쓸 정도로 자신과 최린과의 연애사건은 별 게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할 때 김우영한테 자신만을 사랑해달라고 했던 말을 생각하면 적반하장 아닌가? 아이들을 생각해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나혜석은 김우영의 간통죄 운운에 이혼도장을 찍었지만, 2년 간의 유예 기간을 갖자고 합의를 해서 냉각기를 갖던 중 김우영이 기생 출신과 혼인신고를 해버리는 바람에 나혜석의 기대는 물건너 가고 말았다. 나혜석이 아이들을 키우며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하고 그림을 팔아서 보탠 돈으로 장만한 집에 대한 지분을 요구했지만 김우영은 바람을 피운 여자에게 재산은 없다고 선언, 나혜석은 귀국 해서 낳은 막내까지 4명의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건 물론 무일푼으로 쫓겨난 처지가 되었다.
나혜석은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써서 생활을 이어가지만,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나혜석의 유명세도 힘을 잃었다. 이혼을 하고 나니까 전시회도 관람객의 발길이 줄었고, '조선미전'이라고 줄여부르기도 하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으로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도 전과 달리 당선되지 않았다. 나혜석은 구미 유람 중이었던 이유로 중간에 2번을 빼고 10여년 동안 해마다 작품을 출품해서 당선 됐었다.
오늘날로 치면 미술학원인 '여자미술학사'를 서울에 차렸지만 학생들이 찾지 않아 이마저도 그만둬야 했고, 친구였던 스님 김일엽을 찾아가 예산 수덕사 아래의 수덕여관에 장기 체류하면서 합천 해인사를 비롯 몇몇 절을 순례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팔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김우영이 대전에 근무했을 때 아이들이 보고 싶어 아이들을 찾아가 학교 앞에서 기다렸지만 김우영의 신고로 실패하기도 했고, 김우영이 네 번째로 결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사회사업가였던 양한나와 살던 서울 돈암동에도 아이들을 보러 찾아가기도 했다. 막내 아들 건이 한국은행 총재 시절 기자가 나혜석에 대하여 질문을 하니까 자신은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하더란다. 반면, 손자는 할머니에 대해 이해를 하고 나혜석의 행사장에도 모습을 보인단다.
나혜석은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던 덕에 돈에 대해 철저하지 못했다. 결국, 김우영과의 이혼과정에서 이런 허술함이 드러났고, 일생을 파멸로 몰아가는 데 한몫을 했다. 김우영을 상대로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고 최린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같은 해)도 이혼 당시가 아닌 자그마치 5년이 지나서 한 걸 보면 돈에 쪼들린 생활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나혜석이 이혼고백장을 발표했을 당시 김우영은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못난 남편이면 여자가 바람을 피웠겠냐는 시대적 시선 덕분에 고객의 발길이 끊겨 변호사 생활을 할 수 없어 다시 일본 외무성 관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첩을 여러 명씩 두고 살던 남자들이 살던 시대에 여자의 바람은 남자의 못남으로 이어지나 보다. 김우영은 미국 방문 당시 유학생한테 친일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귀국 후에 변호사 생활로 전환을 했던 거 같은데, 나혜석의 이혼고백장 발표로 다시 일본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혜석은 1948년 12월 서울 원효로의 시립자제원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그런데, 나혜석에게는 반전이 있다. 김우영과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혜석은 역사에 친일인사로 남았을지 모른다. 나혜석이 사망했을 무렵, 나혜석과 관계를 맺었던 이광수, 최린, 김우영은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법정에 서게 된다. 친일파로 단죄를 받은 것이다. 일본이 식민지 관료에게 1년 9개월 구미유람이라는 파격적인 특혜를 준다는 건 훗날 김우영이 친일파가 되기에 딱인 떡밥 아니었을까?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친일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최린과 이광수는 반성하는 기미라도 있었는데, 김우영은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끝까지 우겼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김우영은 네 번 결혼을 했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펴낸 자서전에는 나혜석이랑 세 번째 부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으로 살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삶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나혜석의 결혼생활은 조선사회 최상류층 여성의 생활이었다. 서울에서 최초로 개인 유화전을 개최한 화가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특선과 입선을 하는 영광을 누렸다. 식민지시대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위 외교관의 부인으로서 은밀하게 독립운동가를 도와준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는가 하면 일제의 특전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구미 여행을 하면서 바깥세계를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책을 읽기 전 나혜석에 대한 내 생각은
1. 글 첫머리에 언급한 대로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전남친 무덤으로 가자는 여자와 그걸 또 들어주는 남자는 또 뭐냐! 나혜석이 김우영을 대놓고 먹인다는 생각에 나혜석이 속된 말로 재수없다는 생각도 들면서 그걸 또 들어주는 김우영을 보면 그 여자에 그 남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 나혜석이 최린에 대해 이혼고백장을 발표할 게 아니라 김우영을 상대로 재산 분할 소송을 하고, 세상을 상대로 아이들을 만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여성 전체의 문제로 끌고 갔더라면 여자들의 상황이 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을 못보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빠 나경석은 나혜석이 세상이 조용해질 동안 잠시 조용히 있길 바랐었는데 나혜석은 참지 못하고 이혼고백장까지 발표하면서 이 마저도 어기는 걸 보면서 나혜석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던 거 같다. 아꼈던 만큼 실망이 커서인지 나혜석을 집에 들이지 못하게 했다. 올케의 배려로 오빠가 없을때만 집에 다녀가곤 했고, 힘들 때 올케 덕분에 나이를 속이고 양로원에도 갈 수 있었다.)
3. 이중섭의 그림은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왜 나혜석은 화가로 인정받기 보다 '최초'와 '여성'으로만 주목받을까?
였다.
나혜석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이중섭은 교과서에도 작품이 2개나 실렸으며, 이중섭의 작품을 분석하는 책이 출판되기도 하고, '이중섭 미술관'까지 세워졌을 정도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유화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나혜석은 '최초'와 '여성'에 주목할 뿐 화가 나혜석으로는 포용되지 않는다. 나혜석에 앞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남자들(고희동, 김찬영, 김관호)은 그림을 포기했으나 나혜석은 미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나혜석은 출가만 하지 않았을 뿐 승려복을 입고 생활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살면서도 승려가 되면 그림 그릴 시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승려가 되는 길은 포기했을만큼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는데, 후세는 나혜석이 그렸던 수많은 그림에는 주목하지 않고 최초, 신여성, 페미니스트 이런 이미지로만 흥미거리로 나혜석을 소비하고 있다.
마저 읽고 싶었던 한 권을 손에 넣지 못했다 보니 갈증이 일어서 도서관을 더 뒤져서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라는 책을 발견해 빌려다 읽었다. 나혜석의 '구미여행기'와 나혜석보다 4년 나중에 유럽을 여행한 일본 여성의 '삼등여행기'가 실려 있는 책이다. 식민지 여성 나혜석은 일본의 특혜를 받아 일등석과 호텔을 이용해 여행을 한 반면, 제국의 여성 하야시 후미코는 가장 저렴한 삼등칸 혹은 짐을 옮기는 수송선과 주로 싸구려 하숙집을 이용한다. 나혜석은 호화로운 여행이었지만, 후미코는 첫 소설을 써서 받은 인세로 유럽에 도착했을 때 여행경비가 바닥이 나 있을 정도로 빠듯한 여행이었다. 여행하면서 글을 써서 일본의 출판사로 보내서 받는 원고료로 생활하다가 8개월 만에 일본 고베 부두에 내렸을 때 남은 돈이 달랑 30전 남짓이었다. 당시 그림엽서 한 장이 30전이었다.
나혜석과 후미코가 유럽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달랐다. 나혜석은 남편의 직업상 그에 맞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후미코가 만난 사람들은 매춘녀에 거지들까지 있었다. 심지어 매춘부와 며칠 살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혜석은 제네바에서였던가? 여행 중 영친왕 이은을 만나 자신을 그려달라(<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그림 부탁까지도 받았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가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부류도 달랐다. 나혜석은 일등칸을 이용하다 보니 외교관 부인이라는 위치에 맞는 사람들을 주로 만났고, 후미코가 만나는 삼등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로 후미코와 동지나 다름 없었다. 나혜석은 1년 9개월 동안 여행을 했고, 그 당시 기준으로 일반 봉급자가 30년을 꼬박 모아야 하는 금액이 들었다. 후미코는 최소한의 금액을 써가며 8개월 만에 돌아왔다. 100년이 흐른 지금도 1년 9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세계 여행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그 당시 나혜석이 얼마나 특혜를 누렸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개인 경비도 많이 썼던 데다가 김우영이 변호사 일을 개업하는 바람에 돈을 거의 다 써버린 상태에서 아이를 키우다 기여한 재산도 분할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혼을 했던 터라 이후 나혜석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이혼할 때까지 나혜석이 살아온 삶은 일반 여성의 삶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혜석은 출발하기 전 기자 앞에서 뚜렷한 여행 목적도 밝혀놓았고, 관광지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장소를 언급하며 방문했던 박물관을 비롯한 장소들에 대한 소감을 정리해놓았지만, 후미코는 나가이 가후라는 사람이 쓴 <프랑스 이야기>라는 책에 빠져 동경하던 파리를 방문한 탓인지 아니면 빠듯한 여행비 탓인지 여행 스타일도 그냥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는 얘기라 관광지 얘기는 언제 나오나 이런 기대가 생길 정도였다. 나혜석 때문에 읽게 되었지만 후미코의 여행기를 읽는 맛이 더 쏠쏠하긴 했다. 특히, 부산에서 출발한 시베리아 열차 구간 후미코의 이야기는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책을 빌릴 때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여성이 쓴 세계 여행기를 읽을 기회가 흔한 건 아니라는 점에서도 호기심이 발동했고, 지금은 북한 때문에 미래에나 꿈꿀 일이지만 1세기 전에 이미 부산에서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신기했고, 그렇게 다녀왔던 이야기는 호기심 천국 그 자체였다.
나혜석에 대한 책이 없어서 어린이 자료실로 넘어가 어린이 책까지 빌려다 읽었는데도 아직 가시지 않은 갈증 때문에 결국 검색에 뜨지 않았던 품절 도서 한 권을 중고로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읽은 책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다(윤범모)
인간으로 살고 싶다(이상경)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안은미 옮김)
한국의 첫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권행가 / 어린이 서적)
차별에 맞서 꿈을 이룬 빛나는 여성들(이진미 / 어린이 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