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혜석을 읽다(3-3)

by 자체발광

(앞글에서 이어집니다.)



━ 나혜석의 사망 시점은 1946년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실제로 인터넷에서 1946년으로 언급하고 있는 글도 봤다.), 정확한 사망 일자가 밝혀진 건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 공보처가 발행한 1949년 3월 14일자 관보가 발굴돼 거기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1948년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꼬꼬무' 방송 영상을 보고 나서 내친 김에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도 나혜석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다행히 방송 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역사 강연을 하는 그 유명한 사람이 나혜석이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고 얘기하는 부분에서 완전 깼다.


━ 책을 읽고 나서 축첩제도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축첩제도는 1915년에 폐지되었다. 그것도 우리 힘으로 폐지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첩의 호적 입적을 금지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런데도 꼬꼬무 방송에도 나왔듯이 비공식적으로는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었나 보다. 검색을 해보니 21세기인 지금도 공무원 징계 사유에 '축첩'이 있단다. 내가 어렸을 때 옆집 할아버지는 첫 번째 결혼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자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아들을 다섯이나 낳고 두 번째 부인(<한국말에 여성은 없었다> 마지막 글에서 옆집 할머니가 나를 '언년이'라고 불러서 속상했노라고 언급했던 그 할머니)이랑 살고 있었고, 첫 번째 부인은 재를 넘어가야 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채 100m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집에서 두 번째 부인이 낳은 큰 아들이 모시고 살고 있었다. 초딩때였는데도 할머니가 둘이어서 큰할머니 작은할머니라고 부르는 그 할아버지네 손녀인 친구의 사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엄마, 작은엄마처럼 생각했는데 할아버지는 한 명인데 할머니가 둘이어서 부르는 큰할머니 작은할머니 개념은 다르게 다가왔다. 그 당시에도 어른들이 하는 말이 옛날에는 아들을 못 낳으면 두 번째 여자를 맞아들여서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역시 여자는 애낳는 도구였다. 공식적으로는 없어진 축첩제도이지만, 롯데 신격호 회장이나 현대 정주영 회장을 봐도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는 그리 먼 역사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을 읽었다. 혹시나 해서, 같은 내용이긴 하지만 전자책으로 두 권을 빌려서 읽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을 품을 그릇이 못 되었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에서 최린에게 다시 사귀고 싶다고 했던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김우영의 귀에 들어갔는지까지 파악하고 있고, 김우영이 주변인물로부터 어떻게, 왜 이혼을 독촉받고 있는 상황인지까지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나혜석이 한 말이 왜곡되어 김우영의 귀에 들어갔다 한들 왜곡의 문제 이전에 애초에 '다시 사귀고 싶다'고 써보냈던 이 말은 문제가 없던 걸까? 사람 심리가 남의 행동은 결과를 따지고 내 행동은 동기부터 따진다. 나혜석도 그런 우를 범한다. 왜곡되었음을 변명해서 김우영에게 통한다 한들 애초에 다시 시작할 마음이 없었다면 최린은 바보가 된다. 최린이 나혜석에게 '일단 이혼하라. 미래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던 말이랑 같은 급의 발언이다.


━ 어차피 신뢰가 깨진 관계인데 모성애 내세우며 현모양처가 되겠다고 스타일 구기면서 빌고 버틸 게 아니라 재산분할과 함께 아이 양육권을 강력히 거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자는 내 배 아파서 낳았는데 왜 아빠한테만 권리가 주어지냐고 이 점을 부각시켜서라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 시대 전형적인 분위기인 남자들의 내로남불만을 질타할 뿐 아이 양육권을 문제 삼지 않은 게 의문이다.



나는 분명 나혜석에 대해 읽기 시작했는데, 확장되어 나가는 인물들을 검색하고 찾아 읽다보니 학교 때 교과서에서 발견했던 이름들, 교과서에서 접했던 작품의 주인공들이 우수수수 친일파였음을 알게 됐다. 물론, 나중에 친일파로 판명되어 새로 인지하고 있던 인물들도 있었지만 자세한 사항까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나혜석에 대한 호기심 덕분에 검색의 바다에 빠지다 보니 그들을 왜 친일파로 분류하는지까지 덤으로 알게 되었다.


애초에 인물에 대한 책은 읽는 게 아니었다! 책읽기의 어려움은 이런 거 같다. 어떤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활자를 통해서 만날 수 밖에 없는 제약이 가져다 주는 불편은 같은 사건, 같은 사람을 두고도 책마다 다르게 얘기를 하면 독자로서는 천차만별인 이야기를 어떻게 소화를 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걸 추적하는 과정이 공부이긴 하지만, 읽어볼 책이 자꾸 늘어나서 독서 계획이 어긋난다는 게 함정이다. 나혜석을 왜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냐는 분위기와 나혜석의 독립운동이 가려졌다는 저자의 말을 접했으니 도서관 서고에서 잠자고 있는 나경석의 딸 나영균이 쓴 <일제시대, 우리가족은>이라는 책까지 마저 읽어봐야겠다. 이 책 말고도 두 권을 더 찍어놓은 상태다. 이렇게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었는데 읽어야 될 책이 늘어나서 큰일이다.




글을 다 써놓고 자려고 누웠는데 나혜석이 남성을 깨우고 여성을 깨우기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까발린 건지 자신의 사생활 폭로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남성사회 비판, 여성 의식 깨우기라는 형식에 기댄 건지 의문이 스쳐가면서 헷갈렸다. 쓰다 만 이혼고백장을 완성해서 발표한 동기가 '나혼자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나는 이렇게 망가졌는데 김우영이랑 최린은 승진도 하고 잘 나가네?'에서 출발했다. 구미 여성의 생활까지 끌어와서 이혼고백장을 써서 발표한 건 자신을 합리화하는 면피용이라는 오해를 부를 소지도 다분했다. 자기 사생활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닌 다른 여성들을 위한 버전으로 이혼 전에 글을 발표했다면, 정말 여성의 처지를 생각해서 쓴 순수한 글로 보였을텐데 불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이혼고백장 발표는 내용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남자들은 물론이고 같은 여자들도 발끈할 정도로 '쇼킹한' 일이었지 '먹히는' 방식은 아니었다. 저돌적이고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을 보여주고 끝났다.


이혼고백장을 발표해서 파문만 일으키고 김우영의 반응도 얻지 못하고 최린을 상대로 소송에 들어갔을 때도 목표로 한 위자료도 아닌 얼마간의 위자료를 손에 쥐고 물러났다. 오늘날처럼 부끄러움에 자진 사퇴를 하거나 처벌로 직장을 잘리는 것도 아닌데 위자료를 대폭 할인을 해줄 게 아니라 금액을 고수하든 재판을 고수하든 끝까지 갔어야 했다. 후세 여성을 생각한다면 재판을 끝까지 밀어부쳐서 최린의 얼굴에 먹칠을 해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여자를 쉽게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이게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한방 먹였어야 했다. 어차피 칼 뽑아든 거 김우영을 향해 재산분할과 아이들 양육권까지 물고 늘어졌어야 했다. 모성애 때문에 이혼은 힘들다고 발을 동동 구를 게 아니라 모성애를 내세워 아이는 엄마가 데려가야 한다고 주장을 했어야 했다. 김우영한테서 재산도 못찾아, 아이들도 남겨놔 이래놓고 최린을 정조유린죄로 고소를 한 건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 가서 화 푼 거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글을 마무리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거다.


<이혼고백장>에는 쾰른에서 최린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공(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렵니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고소장에는 최린이 설렉트 호텔에서 '지위와 명예로 설복케 하였으며,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위험해질 거다' 이렇게 협박했다고 쓰여 있다. 이거 어째 앞뒤가 이상하다. 나혜석이 최린한테 괘씸죄 적용한 거 아닐까? 실제로 책에는 나혜석이 '분풀이', '야속', '반항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소완규 변호사와의 대화를 실어놨다. 이혼하고 나서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날 경비로 2,000원을 요구한 것마저 거절하고 일체 생활을 돌봐주지 않아서 정신적 고통이 크고,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생활이 어려워졌으니까(내가 이혼을 하면 당신이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냐, 이건 최린 당신 책임이다. 그러니까) 위자료 12,000원을 청구하겠다 이 얘긴데, 모성애 땜에 이혼 못하겠다고 발 동동 굴렀던 여자 맞나? 막상 이혼 '당하니까' 최린 책임이란다. 기꺼이 도와주는 변호사가 옆에 있는데 김우영한테서 찾아오지 못한 자신의 재산을 찾아올 궁리를 해야지 최린을 걸고 넘어진 건 실수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제관념은 온 삶을 파고 든다. 일관성 유지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야 담보되는 영역이었다. 가난한 주머니 사정은 나혜석의 일관성을 좀 먹었다. '사랑해. 근데, 정조유린죄야!' 이건 뭐지?




나혜석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혜석 시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에서 끝난 게 아니란 생각과 함께 내가 만났던 고리타분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1.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사정으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고등학교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선언으로 나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 생활을 하다가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갔다.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남동생은 고등학교에 갔다. 우리집은 아들 셋, 딸 하나였다.


어느 날 군 제대 후 복학을 한 선배 한 명과 나 포함 여학생 셋까지 더해 넷이 학교 식당에 앉아서 수다를 떨게 되었다. 하도 오래되어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앞뒤 흐름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복학생이 "나는 여자들이 왜 대학에 오는지 모르겠어. 그냥 있다가 시집이나 가면 되지." 이렇게 말을 한 건 똑똑히 기억한다. 내 귀를 의심했고, 화가 나서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케케묵은 발상을 던지냐고 말하고 나서 탁자를 탁 치고 일어나 자리를 떠버렸다. 그래서 나는 '지잡대'라는 말에 유감이 없다.



2. 배낭 여행을 가려고 알바를 하는데, 휴학을 하고 나처럼 알바를 하러 온 남학생이 내가 배낭 여행을 갈 거라는 말을 어디서 듣고 와서는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했다. 알바를 떠나 주변 사람들 중에는 국내 여행지는 다 가봤냐고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즘은 체험학습을 빌려 해외여행 못 다녀오면 애들도 무시당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 남학생은 이담에 결혼하면 여자가 돈 벌어서 자기 공부시켜 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놓고 나한테 볼링 치러 가자고 꼬셨다. 나 머리에 총 안 맞았다고 했다.



3. 내 인생 첫데이트에서 밥을 먹고 밥값을 내가 계산했다. 그런데, 식당을 나와서 상대가 하는 말이 "OO씨, 남자 앞에서 함부로 돈 내는 거 아니에요."였다. '아니 이게 무쓴 쏘리?' 귀가 번쩍 뜨였다.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 이런 노래 가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내가 계산할 게 아니라 계산하게 기다렸어야 되나?', '탁자 밑으로 밥값을 건네주기라도 했어야 되는 거야 뭐야!' 뭐가 됐든 이게 한소리 들을 문제로 작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아서 그 남자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한쪽에선 왜 돈 안 내냐고 그러고 한쪽에선 왜 돈 내냐고 그래서 이 웃지 못할 상황에 나는 잠시 혼란의 시간을 가졌다. 성격이 다른 경우지만 비슷한 일을 한 번 더 겪고 난 후로 '정말 남자 앞에서 밥값 계산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로 결론을 내리고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 물론, 요즘 같으면 택도 없는 소리겠지만 그땐 밥값 지불에 대한 논쟁? 토론?이 많았던 시기였다.


4. 배낭여행을 가겠다고 했더니 어느 날 외숙모가 와서 하시는 말씀이 "지집애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해외여행이니? 그 돈으로 시집이나 가!" 였다. 여행비 보태준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쉽게 뱉어내는 게 불쾌했다. 부모님 입장 생각해서 하고 싶은 말은 참았지만 속에선 열불이 났다. 그동안 억눌렸던 게 터지면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되니까 내가 벌어서 내가 가겠다는데 왜 이렇게들 못살게 구나 싶어서 속이 엄청 쓰렸다.


5. 언젠가 추석 때 남편의 근무 사정으로 아이랑 둘이서만 부모님을 보러 갔던 적이 있다. 버스 한 번 타면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닌 데다 명절이라 버스표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남편의 누나네한테 부탁해서 중간에 내려달라고 하고서 동생이랑 고속도로 톨게이트 입구에서 접선을 하기로 했다. 명절을 몇 번 건너뛰고 오래간만에 만났던 동생이 그냥 집에 있지 뭘 고생하면서 오냐고 하길래 시댁에서 상차리고 있어야 되는데, 명절 차례 끝나면 빨리 빠져나오고 싶다고 했더니 명절엔 다 그렇게 보내는 거 아니냐고 하길래 버럭해버렸다.



내가 나혜석 시대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걸 무슨 수로 이해를 하나! 버전만 달라졌지 아직도 의식의 밑바닥에는 그 시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이게 자그마치 나혜석의 시대로부터 1세기 가까이 흐른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나혜석의 시대에는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에다 남존여비와 가부장제까지 더해져 사회가 꽉꽉 막혀있던 때라 그랬다는 시대적 배경이라도 있다지만, 오늘날은 왜?

작가의 이전글나혜석을 읽다(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