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데 사적이지 않은

by 자체발광

이 글은 내 영혼에 충격을 던져준 진상 남자들 얘기다. 내란성 수면장애, 내란성 불면증으로 뒤척이다 즉흥적으로 쓰게 된 글이고, 제목도 원래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성추행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월 속의 사건(?)들을 끄집어내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들까지 딸려 올라와서 제목을 바꿔야했다.


계엄이 선포됐던 12월 3일 이후로, 잠을 푹 잤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자다깨다를 반복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자고 일어났었다. 12월 후반부로 갈수록 하루하루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일상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밤늦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내란성 수면장애, 내란성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되지 않으려고 잠을 못 이루다가는 언제 끝날지 기미도 안 보이는데 몸에 무리가 갈 거 같아서 의식적으로도 누워봤지만 이미 깨진 리듬이 금방 돌아올 턱이 없었다.


오늘(이 글을 쓸 당시 날짜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은 일단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자는 생각으로 11시가 조금 넘어서 누웠는데, 아무리 뒤척여도 2시가 다 되어가도록 눈이 멀뚱멀뚱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때 내일은 꼭 책을 주문해야지라는 생각과 함께 주문할 책을 떠올리고 있는데, 주문하려던 분야의 책 중에 오래전 최초로 주문했던 책이 책장 어디에 꽂혀있는지 궁금해지면서 갑자기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생뚱맞게 병원에서 간호사한테 한소리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더니 오늘 쓰려는 글 속의 일들이 주르르 떠올랐다. 전화기로 기록하다가 어차피 잠도 안 오는 거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말았다.


나이가 기억이 나는 경우도 있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다행히 순서는 기억이 나서 일어났던 순서대로 쓰기로 한다.


18살 때인지 19살 때인지 모르겠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고향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갔다. 시내버스를 탔는데 정거장을 거쳐가면서 승객이 끊임없이 타더니 순식간에 지옥버스가 되어버렸다. 내가 내리려던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고 나도 내려야 해서 문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순간, TV 뉴스에서나 등장하던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 내 몸을 마구 주무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내리는데도 움직임이 자유로워지기까지 야속하게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손으로 뿌리치면 되는데 팔조차 움직일 수 없어 안간힘을 쓰고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고, 머리에서는 소리를 지르든 도움을 요청하든 하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다. 정말 노골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꼼짝도 할 수 없는 그 얼마간의 상황이 끔찍 그 자체였다. 내가 서 있던 위치상 누가 그랬는지 뻔히 답이 나왔다. 지금 같아서는 사람들 좀 얼추 내리고 나면 돌아서서 뺨이라도 한대 올려치고 내렸을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 했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어디 하소연도 못 하고 낯선 길바닥에서 속상하고 억울하고 찝찝한 기분 때문에 애 먹었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그 불쾌한 기분이 떠오르면 몸서리를 쳐야했다.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식을 코앞에 두고 대형문구에 학용품을 사러 가다가 덤프트럭에 치이는 사고가 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동생이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나서 뒤를 돌아본 순간 내가 저만치 튕겨 나가고 있었다고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인도로 올라서기까지 한두 걸음이 남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눈을 떠보니 누군가가 날 혼내고 있었다. "지금이 도대체 몇 번째냐구요! 적당히 하세요. 사람이 한계가 있는 거예요. 같은 질문을 자꾸 하면 어떡해요!" 난 시간을 물어본 기억도 없고, 대답을 들은 기억도 없는데 시간을 엄청 물어봤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게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병원침대에 누워 있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대꾸할 힘도 없었고 대꾸할 기분도 아니고 그 와중에도 나같은 환자 허구헌 날 받을테고 바쁜데 똑같은 거 자꾸 물어보면 짜증나긴 하겠다는 생각이 스쳐가면서 입을 꾹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추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맙소사! 생리 중에다 팬티 차림이었다.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이 정도면 뭐 하나 덮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인턴 둘이 일반 병실로 옮겨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콩나물 시루라 안 되겠다고 둘이서 침대를 밀고 끌고 들면서 계단을 오르는 거다. 난 병원 복도로 나갈 때는 뭐 하나라도 덮어줄 줄 알았다. 그래서, 추워죽겠는데 너무 하시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둘이 실실 웃어버리는 게 아닌가. 침대에 실려가면서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저런 사람들한테 내 몸을 맡기라고? 뭘 믿고? 퇴원하기만 해봐라. 내가 어디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다시는 병원에 발을 들이나 봐라.' 아주 다짐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다.


배낭여행을 가고 싶어서 한 1년 정도 할 알바를 찾았더니 보건증을 제출하란다. 에이, 젠장! 내가 힘이 있나! 병원을 안 가고 배기냐고! 간사하게도 내 의지는 현실과 타협해버리고 그렇게 들어가게 된 곳에서 진상을 만났다. 책임자가 아저씨였고 떫어도 참아야 할 일들이 많았다. 목표한 금액이 있다 보니까 잘 참아왔는데 고지가 눈앞에 있던 어느날 책임자 아저씨한테서 충격적인 멘트를 소나기로 맞아버렸다. 그런데, 이 바보는 재수없는 눈빛에서 뭐가 이상하긴 했는데,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남자들 사이에서 쓰이는 그렇고 그런 말들이라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있던 덕분에 그냥 듣고 가만히 있었다는 거. 나중에 알게 돼서 알바고 뭐고 때려치우고 나와서 유럽으로 날아갔다. 지금이야 신고가 통하지만 그땐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니가 얼마나 헤프게 보였으면..." 이었다.


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룩셈부르크라는 나라는 기차로 이동할 시 입국 시간 배정을 하기가 좀 까다로운 위치에 있는 나라다. 야간 열차 코스도 없어서 기차 타는 3시간을 훤한 대낮에 날려버리지 않으려면 시간 안배를 잘 해야하는 나라다. 거기다 난 혼자 다니니까 혹시라도 어두운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려고 꽤나 신경을 쓰면서 돌아다녔던 터라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는 참 애매한 나라였다. 몇 년 동안 가보려고 벼르던 곳들이 있는 곳인데 3시간이 대수냐는 생각이 든 순간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방문을 감행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 게 유스호스텔에다 짐을 풀어놓고 숙소를 나와서 공원을 통과해서 목적지를 찾아갈 생각으로 공원에 들어섰고, 갈림길이 나와서 벤취에 앉아 쉬고 있는 노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서 길을 물어보고 있던 상황이다. 그때 뒤에서 조깅 복장으로 뛰어오던 아저씨가 다가와서는 나한테 "너 이쪽으로 갈 거야? 아니면 저쪽으로 갈 거야?"를 물었다. 척하면 삼천리! 처음 보는 사람이 낯선 사람한테 다가와서 다짜고짜 그걸 궁금해 한다는 건 필시 뭔가 의도가 있다는 거. 벤취에 앉아 있던 분들이 가르쳐 준 내가 갈 길 반대 방향으로 길을 가르쳐주고 나서 나는 그 분들이 가르쳐준 길로 걸음아 나 살려라 부지런히 걸어갔다. 룩셈부르크에 들어온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룩셈부르크에 대한 인상이 팍 구겨졌다.


나라가 작다 보니 룩셈부르크 내에서는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보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왕창 기다리고 찔끔 기차 타기를 몇 번 했더니 회의가 좀 들었다. 다음날 여행 출발전부터 가려고 벼르던 곳들을 그렇게 기다려서 다녀오고 나서 다음다음날은 기차를 타고 3시간을 한낮에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일찍 움직여야겠다는 계획대로 남들 자는 거 보면서 유스호스텔을 나와서 나름 파악해 놓은 지름길로 걸어가고 있는데, 아침부터 훤히 트인 주택가 골목에서 성도착증 환자가 짜잔!하고 나타났다. 으아, 내가 한국에서도 못 본 성도착증 환자를 비행기 타고 남의 나라에 와서 보다니! 조깅 아저씨랑 바바리 아저씨(실제 복장은 바바리가 아니었음) 두 남자 때문에 룩셈부르크 하면 좋은 기억들 두고 그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두 달 가량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왔더니 속이 자주 쓰려서 '내가 병원을 두 번 다시 가나 봐라.'를 깜박하고 병원을 찾아갔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있던 병원이었는데 그 동네가 원래 그런 건 아닐텐데 이번에도 이상한 의사를 만났다. 할아버지 의사였는데 노인네한테는 안된 말이지만 완전 재수 없었음. 진료 받을 당시에는 의식을 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TV 뉴스에서 병원에 갔다가 안 좋은 일을 당하는 여자 환자들 소식들이 오르내리는 걸 보면서 '나도 혹시?'라는 생각이 스쳐가면서 당시 진료장면들이 떠올랐고 진료 과정에서 '굳이 그런 행동을 왜?'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던 상황이 있었다. 아뿔싸! 또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병원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완전 웃긴 건, 그 의사 병원이 나중에 우리동네로 이전을 했고, 하필 자주 다니는 길에 위치해 있었다. 그 앞은 얼씬거리기도 싫어서 현재 부모님이 살고 계신 동으로 이사를 하기 전까지 먼 길 돌아서 다니냐고 다리 품 좀 팔았다. 아이가 겨울 방학을 해서 이번에 부모님 뵈러 갔을 때도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하고 있었다.


어느날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골목길 초입 어느 집 대문에서 내 또래는 됐을 남자가 이상하게 나를 자꾸 쳐다보기도 하고 내가 걸어가는 방향을 쳐다보기도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이런 식으로 고개를 양쪽으로 번갈아 왔다갔다 하면서 관찰을 하고 있는 거였다. '거 참 그만 좀 쳐다봐라.' 속으로 이러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훤한 대낮에 성도착증 환자가 등장했다. 집으로 가는 그 골목길이 한 100미터 이상 직진을 해야 집에 도착하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집과 집 사이에 주택을 허물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꽤 넓은 공터가 있었고, 그 공터가, 집을 짓는다면 지하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실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119 신세 당첨인 곳이어서 어디로 피할 곳도 없이 직진만 하거나 후퇴를 해야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몇 차례 겪었는데도 그런 상황에서 몸이 얼어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니까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대문앞 남자는 내가 바바리맨을 마주한 순간 내 표정이 궁금해서 서 있던 거였다. 내 얼굴을 보더니 몸을 돌려서 마지막까지도 나와 바바리맨을 쳐다보면서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두 인간 다 괘씸했지만 바바리맨보다 그 상황이 닥치기 전 언질은 주지 않고 내가 지나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하다가 내가 난처해하는 얼굴을 본 순간 사라진 그 남자가 더 괘씸했다.


어느날 이웃집 아기랑 놀아주고 있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주변에 있던 어떤 아저씨한테 "아저씨, 저기 좀 가봐요. 이상한 사람 있어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들끼리 하는 얘기를 듣고 그때 내 눈 앞에 출현했던 그 바바리맨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때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가버린 그 남자가 나한테 힌트를 주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던 게 생각이 나면서 괘씸한 생각이 또 들어서 속상함이 몰려왔다. 난 바바리맨보다 대문 안으로 사라진 그 남자의 얼굴 표정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로 등산에 재미가 붙어서 산을 종종 찾았다. 등산의 등 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던 터라 산을 다니면서 시행착오도 꽤 많았지만 등산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어느날 북한산이 궁금해서 몇 주를 벼르던 끝에 서울로 등산을 가게 되었다. 확실히 서울은 스케일이 달랐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산을 내려오는데 꼭 무슨 피난민 대행렬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이 흘러내려오던 곳이었는지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고 있는데 나를 스쳐가던 아저씨가 "일행들은 다 어디 있어요? 다 내려갔어요?" 이러길래 혼자 왔다고 했더니 표정이 싹 바뀌면서 "얼른 내려가서 집에 가세요. 나도 딸을 키우는 아빠라 걱정이 돼서 그래요." 이런 말을 남기고 가셨다. '아니, 훤한 대낮에 그것도 사람이 우르르 내려가고 있는 산에서,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라는 곳에서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있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진정 불쾌했다. '내가 죄를 지었나? 훤한 대낮에 길거리를 활보할 수 없게 만드는 위험 분자들한테나 여자들 위험하게 하지 말고 방구석에나 있으라고 할 것이지 왜 멀쩡히 잘 돌아다니는 나한테 집에 가라고 하는 거야!' 이런 반감이 들었다. 뉴스를 봐도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다. 엄마가 재혼을 했는데 새아빠가 딸을 성폭행했다는 뉴스가 뜰 때마다 사람들 반응이 딸이 있는 이혼녀는 재혼을 하지 말란다. 기가 막혔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꼴에 같은 남자라고 '딸이 있는 이혼녀랑 결혼하지 말라.'고는 못하고 현실은 재혼한 엄마를 희생양으로 삼는 세상이다. 100년 전에 남자 글쟁이들이 여자들 길들이려고 대놓고 기사로 썼던 내용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가고 싶지 않은 회식 자리에 마지못해 갔다. 자꾸 상사 옆으로 떠밀길래 싫다고 했더니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이라나.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동료 직원을 팔아서 상사한테 잘 보이려는 인간들은 대체 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인지 사람한테 구역질이 나보긴 처음이었다.


선거하는 날 투표 참관인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만사 제쳐놓고 달려갔다. 그때 당시 동사무소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는데, 늦은 오후가 되니까 동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앉아있지 말고 입구로 나가서 사람들을 맞이하라고 했다. 남자 투표 참관인들한테는 시키지 않았다. 여자 투표 참관인한테만 주어진 주문이었다.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라도 해줘야할 판이었다. 민주주의 투표가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여자는 꽃이라는 말을 던질 수 있는 사람, 투표 참관인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동사무소장을 맡고 있었다.


몇 살 때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도장이 당장 필요해서 집근처에서 도장 팔 곳을 찾다가 길가에 복권도 팔면서 도장도 새겨주는 부스가 보이길래 찾아갔다. 문이 잠겨있어서 그냥 오려다가 부재중이니 전화를 달라는 메모를 보고 전화를 했다. 멀리 있으면 포기하고 다른 데로 갈 생각이었는데 금방 오시겠단다.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주인이 열쇠로 문을 열고 도장을 고르라고 해서 하나 골라서 가격을 물었더니 으아! 무슨 도장이 그렇게 비싼지 입이 딱 벌어졌다. 급하니까 어지간하면 그냥 새기겠는데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금액이라 그냥 가려고 했더니 "여자가 재수없게!"란다. 우와, '여자가'로 시작하는 언어 구사 자체도 놀아웠지만 더 놀라웠던 건 장애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충격이었다. 내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건지 그런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큰 대로였음에도 지나다니는 보행자들이 많지 않은 동네라 내가 항의를 하다가 싸움으로 번지면 그 아저씨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본 사람도 없는데 장애인이랑 싸우는 내가 무슨 꼴을 당하게 될까란 생각과 함께 그 아저씨의 살기를 품은 눈빛에 살짝 겁이 나서 그냥 돌아왔는데, 그날로 장애인에 대한 내 상식을 뒤집어 엎어버렸다. 내 머리는 CPU 처리속도가 늦어서 꼭 한박자 놓치고 나서 할 말이 떠오른다. 나도 "장애인이 재수없게!" 치사하더라도 이렇게라도 한마디 던지고 자리를 뜰 걸 그랬나! 뭐 그래도 찝찝한 기분이었겠지만, 다른 여자들한테도 안 그런다는 법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물러날 게 아니라 눈높이 한번 맞춰줘야 했다. 어렸을 때 이웃집에 큰 행사가 있거나 새해 첫날이 되면 아침부터 남의 집에 가지 말라는 엄마의 타이름이 있었다. 아들들한테는 그러지 않는데 나 혼자 있을 때 조용히 타이르는 게 초딩 때였는데도 못마땅했다. 그때 엄마가 왜 그랬는지 세월이 흘러서 이때 몸소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썼다. 눈 나쁜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어렸을 때는 안경 쓴 여자는 재수 없다는 소리는 허구헌 날 들었고, 안경 쓴 여자는 키스할 때 번거로워서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는 소리도 남자들이 대놓고 해댔고, 남자 사귀려면 컨택트 렌즈 끼라는 소리는 애교로 치고 흘러버려야 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 흘려버리는 자투리 시간들이 아까워서 책 좀 읽고 있으면 똑똑한 여자는 매력없다,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 안 좋아한다 이런 말은 노래처럼 들었고, 어떤 남자가 데려갈지 엄청 피곤하겠다는 말도 여러번 들었다. 먹물 좀 먹었다는 남자들 중에는 정치 얘기 꺼내면 '나랑 정치 얘기 하고 싶냐!' 이러는 인간도 있었다. 의외로 많은 남자들이 여자랑 진지한 얘기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딱딱한, 진지한 얘기들은 자기들끼리 하고 싶어하고 여자들이랑은 성적 농담 같은 가벼운 얘기만 하고 싶어하는 남자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 개인의 경험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이고, 나머지는 얽혀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밝히기 껄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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