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월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출근을 하니 분위기가 어쩐지 어수선하고 분주하다. 몇몇은 이미 보이지 않고 서로들 자리를 바꿔 옮기고 있었다. 인사이동 시기인가 보다. 팀 곳곳에서 가끔씩 한 사람씩 붙들고 일을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긴 했었는데, 우리 팀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휴직이나 이동이 제법 있는 모양이다. 연차를 끌어모아 긴 휴가를 가신 분도 있는 듯 했다.
나 역시 나를 담당했던 선임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슬픔이 아닌 기쁨과 축복의 작별 인사였다. 그분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처음 면접 때부터 얼굴을 익히고 추가합격 전화를 줬던 분도 이분이었다. 무심한 듯 다정하게 오고 가며 나를 챙기고, 업무 중간중간에도 한 번씩 나를 살펴 주는 눈길이 느껴지곤 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첫정이어서 그랬는지 서운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많이 의지했었나 보다. 오늘은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말을 건넸다. 우리는 서로 양손을 맞잡고 흔들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마웠다고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거기에 덧붙여서 예쁘고 건강하게 순산하기를 바라며 깊은 진심을 담아 축복과 행운을 건넸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인 이유는 내게는 이제 이곳에서의 시간이 열 달밖에 남지 않았고, 이분이 복직해서 돌아오면 나는 이곳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계약된 열두 달 중에서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른다고 느껴지는 것을 보니 나는 이곳이 제법 마음에 드는가 보다. 이곳은 그동안에 내가 생계에 쫓겨 일했던 곳들과는 다르게 처음으로 밥벌이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의 일을 주체적으로 찾아서 지원한 첫 직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미가 더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주 2일뿐인 근무라고는 해도 내 마음까지 이틀짜리는 아닌 것이다. 그래, 결심했다.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는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이들의 친절과 다정함에 나를 내맡기고 흠뻑 적시고 채우고 물들일 것이다.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을 둥지로 삼아 어미닭의 품 안에서 적절한 온도와 충분한 보살핌을 받으며 부화할, 다시 부활할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알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의 친절이 비록 직업적 유니폼이자 영혼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 접대 모드의 플라스틱 친절이라고 해도 뭐 어떤가! 서로 적절히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 공간에 머무르며 원만하게 손발 맞춰 일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한 것을. 적어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해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을 장착하고는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와중에도 가끔 찐! 친근한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내 대각선 옆자리 쌤과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웃음 자동 발사! 처음의 사무적인 태도에 친절하기만 했던 갑옷을 벗고 자신도 모르게 순수하고 귀여운 영혼을 살짝 내비칠 때가 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는 또 한 번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손을 번쩍 들더니 나를 부르며 도와달라고 하신다. 서류 편집을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어 혹시 할 줄 아시느냐고 물어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달려가 아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함께 문제를 해결한다.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나는 이런 순간을 좋아한다. 사회복지사들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나는 그런 사회복지사들을 돕는 사람이다. 이것을 나의 작은 자긍심이자 보람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가 마주친 센터장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선생님한테는 이 일이 너무 단조롭고 재미없지 않아요?”
나는 아니라고, 오히려 단순하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센터의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익힌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 마음이 딱 그렇습니다.) 나는 많이 배우고 있다고, 아주 좋다고 말씀드렸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배울 점은 많다. 실제로 많이 배우고 있기도 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렵게 여기지 않고 언제든 다가가서 물어볼 수 있고, 묻거나 도움을 청하면 선뜻 나서주는 친절한 팀원들도 물론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은 조직을 이끌고 있는 리더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느끼는 이분은 보스가 아니라 리더였다.
점심시간이면 환경미화원 여사님과 함께 도시락도 드시고, 점심을 먹자마자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선생님들께 잠깐이라도 같이 계단이라도 걷자며 먼저 이끌고 움직이셨다. 인수인계를 하며 짐을 정리하는 팀원들에게 다가와 “이제 나는 밥만 사면 되는 거죠?”하고 가벼운 농담도 건네시며 “조직의 시스템이 잘 잡혀 있어서 누군가 빠지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조직이 건강한 조직이라고, 한 사람이 빠졌다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조직이라면 위험한 조직”이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내가 들으려고 들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들려 온다. 그만큼 이 조직이 투명하고 수평적이며 개방적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뭇 생명들의 초유! 봄비가 대지를 적신다. 내릴 자리를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세상을 적시는 봄비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p.s. 서류 목록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김명자! 김명자! 김명자!
우리 엄마는 53년생 김명자! 살아계셨다면 70대 초반이 되셨을 나이에 이분들처럼 여전히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계셨을 수도 있을 텐데. 혼자서 말없이 이분들을 응원한다. 우리 엄마 몫까지 마음을 듬뿍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