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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Mar 07. 2024

화려한 봄날에 더 죽고 싶다니!

봄비 같은 복지


공공기관 홍보물을 정리하다가 보건복지부에서 온 벽보를 보게 되었다. 3월에서 5월이 자살 고위험시기라고 한다. 처음 알았다. 꽃 피는 봄날에, 화려한 봄날에 더 죽고 싶다니! 그런데 그럴 만도 하겠다고 곧바로 그 마음이 수긍이 되고 이해가 되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겨울은 모두에게 겨울이니까. 겨울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누구나 꽁꽁 얼어붙고 온통 회색빛에 손발 시리듯 마음 시린 추운 계절이니까. 다들 집안에서 움츠리고 있는 시간도 많고 두텁게 껴입고 있어서 잘 안 보이고 안 느껴지니까.


그러다 눈이 녹고 추위가 풀리고 봄빛이 돌기 시작하면 몇 겹씩 꽁꽁 싸매고 가려져 있던 그 마음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한다. 봄날의 햇볕은 저리 화려하게 곳곳에 형형색색 꽃을 피우는데, 왜 내게는 닿지 않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봄볕을 누리고 사랑을 나누고 꽃구경을 하느라 바빠서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 돌아봐주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듭되는 그 생각들은  사실처럼 여겨진다. 아니, 어쩌면 정말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상대적 박탈감이 자꾸만 더 커져서 자책과 원망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단념과 절망이 된다. 겪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 머리로는 듣고 배웠어도 피부로 체감되지 않는다. 이해도 공감도 안 되고 거의 무관심에 가깝다.

 

"물이 너무 차다, 그치? 우리, 봄에 죽자."
- <더 글로리> -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어린 동은이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할 때 함께 물에 뛰어들어 너무 춥다고 우리 따뜻한 봄날에 죽자고 손을 잡아주던 부동산 사장님이자 집주인 할머니였던 그 어른이 떠오른다. 어리고 젊은 날 타락의 길에 들어섰을 때에도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에도 곁에 그런 어른이, 나를 붙잡아 주는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었더라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그래도 조금은 덜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 어른이 물 밖에 서서 손짓만 하며 젊은 사람이  왜 죽으려고 하느냐고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외치기만 했다면 과연 동은에게 가닿았을까? 자신도 차가운 물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함께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두 손 꼭 붙잡고서 너무 춥다고, 함께 살자고도 하지 않고 나중에 따뜻한 봄날에 그때 가서 함께 죽자고 말하던 그 어른의 절박함이 오히려 동은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구하게 만든다. 그렇게 결국 서로를 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생의 은인이 된다.


몸을 던져 뛰어들어 함께 젖는 일. 도움의 손길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함께 젖는 걸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 살린다. 진정한 공감과 이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돌봄은 돌아봄이다. 돌본다는 건 한번 더 돌아본다는 말과 닮아있다.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와서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한 번쯤은 돌아보는 어른이 되고 싶다. 뼛속까지 저리는 그 아픔과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기에.

 


봄비 같은 복지! 복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내 메마르고 얼었던 땅을 녹이고 적시는 해빙과 해갈의 단비! 그 빗줄기가 흐르고 흘러 움푹 파인 곳으로 가닿아서 좀 더 메우고 고여서 비로소 겨우 조금 평탄하게 만드는 일. 그러니 복지는 부지런해야 한다. 너무 늦지 않게 제때 가 닿으려면.  


사람은 자신이 믿는 대로 자신이 믿는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그런 세상을 살고 싶다.




벌써 두 번째 월급을 받았다. 3개월 차에 접어드는 나는 이제 제법 익숙해졌는지 가끔 주 4일이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또 생각한다. 아직까지 좋기만 한 까닭은 이틀만 일하는 덕분일 수도 있다. 조금 아쉽고 살짝 더 바라는 욕심이 드는 때가 오히려 가장 좋은 때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이곳을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다. 방어모드를 최소화하고 꾸밈없는 나다움을 있는 그대로 뿜뿜해도 괜찮은 곳이다.


“고민하지 말고 도움을 요청하세요. 망설이지 말고 나를 찾아 주세요. 나는 항상 여기에 있어요.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나는 비로소 내게 맞는 옷을 찾아 제대로 처음 입어보는 기분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얼룩을 남기고 싶지 않다. 나답게 좋은 시간, 좋은 인연들로 채우고 싶다. 자꾸만 마음이 커진다. 꽃몽우리가 차오르듯이.


봄이다. 주위를 한 번만 더 돌아보자. 그 봄을 곁에 조금만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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