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가 스물아홉에 재지금 날 때 친할머니께서 챙겨주셨던 식칼이다. - '재지금 난다'라는 말은 분가하거나 독립한다는 의미의 전라도 사투리로 짐작된다. 이 단어의 철자가 '재지금'이 맞는지 '제지금'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께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국어사전에 나오지도 않는 할머니의 그 입말과 뜻을 기억하고 여전히 쓰고 있는 나를 보니 할머니께서는 칼뿐만이 아니라 어휘와 정서도 물려주셨다. (검색해보니 재지금이 '재난지원금'의 약자로 쓰이고 있는 듯 하다.) -
물리적인 시간과 쓰임만큼이나 이제 제법 낡고 여기저기 이도 빠지고 얼룩도 지고 손잡이 부분이 깨지기까지 한 모습이 길고 긴 세월 속에 거뜬히 살아남은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보는 눈이 있는 사수는 여전히 잘 든다며 우리 집 살림 중에서 할머니가 물려주신 이 칼이 가장 쓸만한 물건이라고 말한다.
칼 사진은 위화감이 들까봐 손그림으로 대체했습니다.
그후 사수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사를 여덟번 쯤 다니면서도 버리지도 못하고 잃어버리지도 않고 여즉 간직하고 있는 이 칼은 나에게 있어 친가와 연결된 유일한 물건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할머니의 유품이기도 하다. 사실상 칼로 베어내듯이 가족과의 인연을 끊어낸 손녀가 마지막 집을 떠나올 때, 할머니께서는 당신이 가장 오래도록 가까이 두고 자주 쓰시던 친근하고 익숙한 물건을 내어주신 셈이다. 세월 속에서 자신의 손과 다름없이 길들여진 무언가를 망설임없이 물려주신 것이다.
결혼할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할머니께서 손수 차려주신 밥을 먹어본 사수는 아마도 그 마음을 간직하고서 여전히 소중하게 살려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낡았다고 터부시하지 않고 오늘도 굳이 다른 새 칼을 두고 할머니의 오래된 그 칼을 꺼내서 쓴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날에서 빛이 감돈다. 쓰지 않았다면 벌써 무뎌지고 녹이 슬었을테니. 계속 쓰임으로써 살아있다. 사람 마음 또한 그러하지 않겠는가. 정작 그 유산을 물려받은 나보다도 더 귀하게 그 가치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할머니와 엄마는 매일매일 칼을 제법 쓰셨다. 물론 살림하는 여느 아낙네들처럼 부엌에서도 당연히 쓰셨겠지만, 날마다 장터를 돌며 생선의 배를 갈라 식구들을 손수 먹여 살리셨다. 참으로 여러 목숨 살리는 칼이었다. 그 칼질로 우리를 먹여 살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생활력도 물려받은 셈이다. 손재주가 조금은 있는 걸 보면 조수도 나름 칼잡이의 후예였다. 엄마의 물건조차도 뭐 하나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할머니의 칼이 아직 내 곁에 남아있음이 더없이 감사한 다행이다.
예전에 어느 미용실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 원장님은 이발관을 하셨던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가위를 여전히 쓰고 있다고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이야기해 주시던 기억이 난다. 길이 워낙 잘 들어서 여전히 너무나 쓰기 좋다고. 이야기는 참 소중하다. 이야기가 담긴 물건은 오래 남는다.
엊그제 만난 건물주님은 지하 다섯 칸, 2층에 다섯 칸! 자그마치 상가를 열 칸이나 소유하고 계시는데 가장 첫 마디가 자식들한테 물려줄 거라고 하신다. 자신은 여전히 월급쟁이 직장인이라며 퇴직까지 2년 남았다고 한다.
건물은커녕 상가 한 칸조차도 물려줄 가능성은 요원해보이는 나는 과연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물려줄만한 무엇이 있을까? 그때가 되면 물려줄 어떤 인연이 곁에 남아 있을까? 나는 어떤 이야기를 남길까?
할머니와 엄마는 칼잡이! 할아버지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도마 위 못에 생선 주둥이를 걸고 단칼에 쭈욱- 명태도 잡아서 널고, 장어도 잡아서 널고! 어린 나는 널고 마르면 뒤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