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늦은 오후 바로 근처 아파트에서 작업이 있다고 해서 사수를 함께 따라나섰다. 본작업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러서 준비할 사항들을 체크하고 여기저기 치수만 잠깐 잰다고, 사수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그렇지. 또 속았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들은 조수는 바보 맞다. 매번 속는다. 참 단순하다.
안다. 막상 현장에 가면 처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공구가방도 챙기지 않고 줄자와 간단한 도구 한두 개만 들고 올라갔는데, 치수만 잰다던 사수는 그 자리에서 드라이버 하나만 들고서 고장 난 문을 고치고 있다. 날은 덥고 습하고 조수는 이미 오늘치 인내심을 다 쓰고 온 참이었다. 슬슬 입이 댓 발 나오기 시작한다.
어차피 다 '내 일'인데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미리미리 해두면 다음이 수월하지 않느냐고 사수는 말한다. 어차피 '내일' 와서 본격적으로 할 텐데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와서 지금 꼭 해야 하느냐고 조수는 투덜거린다.
저만치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빤히 보인다. 쏴아-! 순식간에 소나기가 쏟아진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실리카겔처럼 마음도 금세 눅눅해지고 무거워진다. 시간은 이미 흐를 만큼 흘렀고, 조수는 별수 없이 그대로 철퍼덕 맨바닥에 주저앉아서 사수가 마음먹은 만큼 일을 마무리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보면 몸과 마음은 정말 하나다.
다음 날 아침, 조수의 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날이다. 사수 혼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업에는 조수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인다. 이렇게 마음의 유니폼을 입는 날에는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쉬이 짜증내거나 투덜거리지 않는다. 충분히 감당한다. 나름 방탄에 워터푸르프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로 1400 짜리 욕실장을 들고 내리고 붙잡고 받치며 한몫 톡톡히 해낸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창밖으로 순식간에 무지개가 뜬다. 그림을 그려놓은 듯 유난히 선명한 무지개였다. 조수는 무지개가 사라질까 얼른 사수를 부른다. "우와-!" 하는 사이 순삭이다. 20층 높이 아파트 모퉁이에 걸쳐진 그 무지개는 그 순간 우리만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까이에 눈앞에 선한 어제의 먹구름과 오늘의 무지개처럼 같은 한 마음인데 유니폼을 입고 안 입고의 차이가이렇게나 다를까.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토끼의 간처럼 넣었다 뺐다, 집에 놓고 오기도 하고 필요할 때 얼른 다시 장착하기도 하고 자유자재로 되면 좋으련만. 아직 조수는 내공이 한참 부족하여 마음이 뜻대로 말을 잘 안 듣고 심통이 자주 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뒤바뀌는 마음이 꼭 요즘 날씨를 닮았다. 유난히 무덥고 힘겨운 여름이다. 그럼에도 일이 있음에 또한 감사한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