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나무 여운 Aug 04. 2024

사수, 고수를 만나다

프로의 길


집수리의 영역은 의외로 꽤 넓다. 생각지도 못한 뭘 이런 것까지 요청하나 싶을 만큼 다양하다. 집이라는 공간이 모든 생활의 중심이자 모든 기술과 재료의 집약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수 역시 아직도 모르는 영역, 한 번도 손대본 적 없는 영역이 더 많을 것이다. 물론 혼자서 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나름의 작은 연대가 형성된다. 철거 전문, 누수 전문, 목공 전문, 전기 전문, 유리 전문 등등 주변의 동료 업체들과 서로 오고 가며 협업도 하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상부상조하게 된다.  


사수의 손맛을 한 번 맛본 동료들은 물론이고 근처 부동산과 철물점에서도 이제는 대놓고 사수를 부른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기에 정말 감사한 일이다. 같은 업종에 신생 자영업자들이 많이 늘어서인지 자잘하게 들어오던 한 건 한 건이 눈에 띄게 줄었다. 다들 어려운 만큼 이왕이면 더 저렴한 쪽을 찾게 마련이니까.


사수는 이럴 때일수록 더 고난도의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며 거금을 주고 거대한 장비를 들여왔다. R&D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면에는 적극찬성이라 이번에 잔소리는 참았다. 대신에 그럼 나도 하나 살 게!    




인근 부동산에서 아파트 위아래 두 층에 연이어 누수 피해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벽을 뜯어내고 말려서 다시 벽을 세우는 목공작업을 맡게 되었다. 이번엔 집주인이 먼저 섭외한 도배 전문가와 협업을 하게 되었다. 이분들도 부부가 나란히 함께 다니신다. 자그마치 20년 가까이 하셨다고 한다. 아들을 낳자마자 친정 언니분께 맡겨놓고 뛰어드셨는데, 그 아들이 다 커서 군대를 갔으니 그만큼 되었다고 하신다. 우리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민다. 이 말은 딱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이 정도 일은 일도 아니에요."


함께 점심으로 시원한 막국수를 먹으며 말씀하신다. 작년에 비하면 정말 눈에 띄게 일감이 줄었다고. 그 앞에서 나의 엄살은 쥐도 새도 모르게 쏙 들어갔다. 어리광도 TPO를 안다.


현장에서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고 보니 손이 해내는 일이 참으로 위대하다. 아파트 벽을 뜯고 보니 이렇게 허술할 수가 없다. 아무리 집중하고 공을 들여도 울퉁불퉁하고 속 빈 강정 같은 벽을 완벽하게 평탄화하기는 어려웠다. 사수는 최선을 다해서 마무리를 하고, 그다음은 진정한 고수분께 맡겼다. 여자 사장님께서 먼저 부분 부분 부직포를 여러 겹 덧대어 단차를 맞추고 밑작업을 깔끔하게 해 두신다. 그러면 남자 사장님께서 겉벽지를 붙이신다. 20년간 손발을 맞추셨으니 합이 그야말로 예술이다. 속속들이 허접함을 다 덮어주고 가려주는 도배와 장판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덕분에 얻은 속병은 오랜 고질병이다.


선후작업과 청소 및 뒷정리를 도맡으시는 여사장님은 해가 저물어도 물러날 기색이 안 보이신다. 우리가 벽 작업을 마치고 거실, 부엌, 방마다 LED전등 교체 작업을 다 마무리할 동안에도 싱크대 앞에서 커터칼을 들고 실리콘을 벗겨내고 계신다. 맞네. 우리 일은 정말 일도 아니구나. 아직 멀었구나. 사장님은 지구력끝판왕이시고, 나는 엄살끝판왕이구나.


전등도 뗄 줄 알아야 하고, 문짝도 뗄 줄 알아야 하고, 실리콘도 벗기고 입히고 할 줄 알아야 하고. 이 일은 한 가지만 할 수가 없다고, 골고루 다 할 줄 알아야 한다고 20년 고수께서 말씀하신다. 그 앞에서 햇병아리도 못 되는 내가 감히 소리 높여 맞장구를 친다.


도배를 다 마치고 나서 보니 스프링쿨러 커버캡도 사이즈를 맞춰 미리 구해다가 하얗게 새것으로 싹 갈아서 끼워 놓으셨다. 도배 후 몇 개가 사라졌다는 그 캡만 좀 구해달라는 요청에 맞는 사이즈를 찾아서 우리도 몇 번 다녀본 적이 있어서인지 그 부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오래돼서 누렇게 변색된 기존 캡을 그대로 씌우는 건 도배를 아무리 잘해놔도 일을 덜 한 것 같아서 본인 성격에 안 맞다고 하신다. 사수 못지않게 그 이상 꼼꼼한 센스가 돋보이는 진정한 고수를 만났다. 체력이 고갈되고 나면 발휘할 센스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조수는 하수 중에 하수!   


작은 연대가 조금 더 커지고 굳건해지는 하루였다.






고수의 손길




《맹자(孟子)》에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이란 말이 나온다. "물이 흐르다 웅덩이를 만나면 그 웅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네게 꼭 한마디를 해야 한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프로가 되려면 오래해야 한다. 오랜 집중과 반복되는 훈련을 거쳐야 한다. 어느 영역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영역을 고르라는 것이다. 좋아하므로 그 길고 오랜 여정을 견딜 수 있고, 그리하여 고된 수련이 주는 깊어지는 숙성의 기쁨을 얻으라는 것이다.

프로가 되는 훈련은 그 길 앞에 놓인 크고 작은 산들을 넘는 것이다. 어느 날 절벽처럼 나타난 바위벽 앞에 서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정신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이것저것 쉬운 단계에서 잠깐의 열정으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빨리 습득되는 작은 재주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연습과 훈련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끝까지 갈 수 있을 때 고루 습득되는 것이다. 그래야 프로의 기술로 이어지게 된다.

네 안에 들어 있는 무수한 아마추어들에 맞서라.

혹 커다란 웅덩이가 나타나 물길이 막히고 고여 더 나아가지 못할 때도 쉽게 던져버리고 다른 주제, 다른 영역, 다른 재미로 도망가지 말고 매일 그 커다란 웅덩이를 조금씩 채워 가거라. 그 거대한 웅덩이가 다 차면, 그때 비로소 호수가 만들어진다.

채우는 시간이 길수록 수량이 풍부한 호수가 되는 것이다.

너를 잡다하게 써 낭비하지 마라. 너를 딱 맞는 네 일에 집중해서 쓰도록 해라. 그리하여 오래 그 일을 배우고, 좋아하고, 이윽고 그 일로 먹고살고 즐길 수 있는 통달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 구본형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잡다한 일로 꼭 하고픈 일을 못하는 P에게' 중에서







(TPO : Time, Place, Occasion의 약자로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의 의미)

이전 09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