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철활인

닿지 않으면서 가장 깊이 가닿는

한강 <희랍어 시간>

by 햇살나무 여운




말은 속일 수 있다.
글은 꾸밀 수 있다.
눈은 감출 수 없다.

감출 수 없으니

질끈 감아버리는 수밖에.

우리가 쉴 새 없이 떠드는 까닭은
감출 수 없는 그 눈빛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가 이토록 소란스러운 까닭은
너와 나 사이에 침묵을 두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눈으로만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떠듦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겨우 증명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떠들지 않으면 멀어질까 봐 끊길까 봐
불안하고 못 미더운 관계라면
과연 떠든다고 가닿겠는가

닿지 않으면서 가장 깊이 가닿는
눈빛으로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오히려 더 이해받는
소리 없이 소란한 대화가 그립다.

아, 소리 없이 육중한 언어가 또 있다.
손길과 행동!
소리는 없어도 따듯하니
온어溫語라고 부를까?

또 오늘치 어휘를 말로 다 휘발시켜 버려서
글쓰기는 글렀다.
또 떠들었지만, 우리는 소란소란 말고 도란도란인 것으로 하자.


고요히 그윽하게 뒷통수만 바라보아도
나를 읽어주는 이가 단 한 명만 있다면
우리가 이토록 외롭다고 느끼지는 않을 텐데.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 한강 <희랍어 시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 해 한 해 한 잎 한 잎 한 입 한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