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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철활인

설은 날 섧은 날

- 황동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by 햇살나무 여운







부동산은 없고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안동소주 400cc 1병,
짐빔Jim Beam 반 병,
품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올라봐야 별볼일 있겠는가,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 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베란다가 성화聖畵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 황동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아마도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리라 / 신형철 <인생의 역사>


명절이라는 것이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그리움도 외로움도

도드라지는 때이기도 하지요

외로움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돌아오지 못하는 식구가 있고

빈 자리가 더 설게 느껴져

하필 이번 설은 유난히

섧디 섧은 계절에 들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외롭지 않게

그렇게 많이는 춥지 않게 고프지 않게

부디 마음 한 구석 환해지는

고요히 평안한 명절 되시길.


새해 복 많이 아끼고 삼가여 나누고

누리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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