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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철활인

지혈의 시간

능소화를 바라보며

by 햇살나무 여운


비에 젖고 짓이겨진 풀잎이

더 짙은 내음을 내뿜듯

우리의 영혼이 베이면

피를 흘리듯 영감이 쏟아지죠

상처만큼 쉬운 글감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순간 지혈을 하듯

자신을 누르고 견디고 참아내야 해요

온 힘을 다해 쓰지 않기 위해

그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차가운 이성이 슬픔을 잠재우길

기다립니다

말로 내뱉기보다

말을 삼킴으로써

무엇을 쓰기보다

무엇을 쓰지 않음으로써

지켜온 시간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때로는 쓰지 않음이

나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내기도 하죠.


그 한 끗의 마음이 참 어려운 것이지요

그리 쉬운 선택에 나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내게 쉬운 선택을 하도록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화려한 꽃만 보이나요

그 뜨거운 여름의 빛깔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봅니다

자칫 눈이 멀 수도 있으니


대신 필사적으로 짙은 푸르름에

눈길을 두어요

꽃은 하루 만에 집니다

모르지 않잖아요

나를 지켜주는 건 언제나

그늘 드리우는 짙푸른 잎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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