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다 떨어진 걸 어찌 알았는지 며칠 전 친구가 나누어준 신선한 그 향기를 얼른 한 모금 마시고 싶었다. 정작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남편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군말 없이 핸드 밀에 홀빈을 넣는다. 저런, 고와도 너무 곱게 갈아 주었다.
“너무 곱다. 살짝 더 거칠게, 양은 좀 더 많이.”
“이만큼?”
“응, 딱 좋아. 고마워.”
남편은 나의 손이다. 내가 해도 되는 걸, 나도 할 수 있는 걸 굳이 남편에게 내민다. 얼마 전에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우연히 오락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쩌다 해 본 적 없는 인형 뽑기에 돈을 써버렸다. 남편도 나도 절대 이런데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 <포커스>에서처럼 전날 저녁 드라마에서 인형 뽑기를 하는 장면을 본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게 틀림없다. 물론 이때도 남편의 손을 빌렸다. 내가 하면 돈을 그냥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진짜 뽑힐 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기분 전환에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 마지노선은 딱 5천 원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세 번 만에 진짜 인형을 뽑아 주었다. 나는 어제 봤던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순간 쌩 오버를 하며 좋아했다. 남은 2천 원으로 선심 쓰듯이 남편에게 총 쏘는 것을 허락했다. 좀 맞추는 듯싶었지만 인형은 떨어지지 않았다.
“수색대 출신이라며?”
극장 옆에 오락실이 있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지난 5월이었던가? 해 질 무렵 초승달이 유난히 예쁜 날이었다. 옆에 나란히 함께 뜬 별도 유난히 밝게 빛나며 어우러져 달과 별이 그림 같았던 날이었다. 평소 휴일에도 근무하는 풀타임 워킹맘으로 쉽사리 짬을 내지 못하던 친구가 가장 먼저 달이 예쁘다고 사진을 찍어 올리니 더 반갑고 흐뭇했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서로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 올리며 예쁘다고 한참 깨톡깨톡 하던 중에 가장 먼저 사진을 올렸던 그 친구가 "저 별 금성 맞지?" 하고 물었다.
가장 밝고 일찍 뜬 별이니까 샛별, 금성 맞지 않을까 의견을 모으는데 친구의 남편이 아니라고 했단다. 그림이 그려졌다. 퇴근길 저녁 하늘 올려다보며 모처럼 감성 돋아서 기분 좋게 사진을 찍어 우리에게 보냈듯이 남편에게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금성이 맞다, 안 맞다 팩트를 들이미니 모처럼 느끼던 순간의 낭만, 마음의 여유와 감성을 파괴하는 뜻밖의 실랑이가 생긴 것이다. 친구의 남편은 분명 ‘T’ 일 것이다. ‘T(Thinking)’와 ‘F(Feeling)’의 극명한 차이다. 어째 '신랑'이랑 '실랑이'가 마침 생김새도 어감도 비슷하네.
우리들의 그다음 반응들이 더 재미있었다. 나는 '초승달 옆 별' 키워드로 검색해서 전문가가 썼을 법한 블로그 글을 캡처해서 올리고, 한 친구는 라디오에서 분명 금성이라고 했다고 덧붙이고, 별자리 앱까지 찾아본 한 친구는 가장 정확한 뉴스 기사 링크를 올려 주었다. 마지막에 내가 덧붙여 말했다.
"5만 원 내기해서 받아 내!"
10년을 넘게 같이 살아도 그렇게나 모른다. 그냥 예쁘다고 꽃 찍어 보내고 달 찍어 보내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남자와 여자는 그 옛날 어느 책 제목처럼 화성과 금성만큼 다르다. 그래도 저 달 옆의 별처럼 좋은 것 보고 예쁜 것 보면 여전히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상황이 나는 너무나 유쾌하고 여전히 한결같은 어여쁜 내 친구들 덕분에 한참 웃으며 흐뭇하게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남편 왈!
"와이프가 금성이라고 하면 금성인 거야! 그게 토성이든 목성이든 맞고 틀리는 게 뭐가 중요해. 와이프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역시 살아남는 법을 알아. 딱히 실랑이 없이 원두 곱게 갈아준 마음이 고마워서 오늘은 콩국수 위에 꽃을 얹어 준다. 이런 게 사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