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로 씻다

도종환 '고요'

by 햇살나무 여운


도망쳤다.

지쳤다.

여기는 어디인가?


일 년 내내 쫓기듯 도망쳐 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길을 잃고 헤매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아무리 도망쳐도 돌아올 곳은 결국

빈 둥지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잊는다, 열심히.


모든 고통은

자신을 홀로 두지 못해서

생긴다고 했던가

두려웠다, 외로움이.

그래서 도망쳤다.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는 이

아무도 없다, 내 그림자뿐.

그림자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바라보니

저 멀리 작은 불빛 하나,

고요였다.


고요는 익숙한 듯

거칠어진 내 숨이 가라앉기를

가만히 기다렸다가

나를 씻기고 닦고

내 몸을 데우고 먹이고 재운다.

고요는 이내 거울을 꺼내

나를 물끄러미 비춘다.

보여 준다, 바라보게 한다.

고요는 씻김굿이다.

말갛게 씻긴 내 영혼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이 보인다.


나는 또 어김없이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새로운 길을 나선다.

고요는 여전히 그곳에서

나를 기다릴 뿐

아무 말이 없다.


고요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떠나온 것은 언제나 나였다.

오늘은

오늘 하루 만큼은

고요에게 돌아가는 날이다.


고요가 그리웠다.






내가 버리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 감추어둔 비겁하고 창피하고 나약한
수천 페이지의 문장들을 다 읽을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허약하며 자주
바닥이 드러나는 사람인지
고요는 이미 다 안다

- 도종환 '고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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