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우리처럼... 그렇지만 우리는 아니다.
-도장(道場) 깨기-
그를 제거한 때는 지난밤 이었다. 정확히는 오늘 새벽 2시 32분이었다. 서울역에서 돌아오는 막차 버스가 광화문을 지나 독립문을 향하던 시각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내가 사용한 무기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모갑 금은장 옥구보도 (玳瑁甲金銀裝玉具寶刀)'였다. 원래 의례용이지만 칼의 날카로움은 목숨을 취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19번째로 제거한 목표였다.
그에게 도전장을 보낸 것은 지난달 초였다. 내가 도장(道場) 깨기에 나섰다는 것은 이미 이 바닥에서는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장을 깼는지 아닌지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목숨을 건 결투이긴 하지만 그 결과를 서로 드러내지 않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총 20개 도장에 도전장을 보냈다. '한 달 후 도장깨기를 시작한다.' '매일 한 도장씩 도전한다.' '중간에 내가 지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도전을 받은 도장이 진다면 결과는 20일 이후에 공개한다.'는 게 규칙 아닌 규칙이었다. 또한 결투 방법은 도전을 받은 측에서 정하기로 했다.
19번째 목표는 칼을 사용하길 원했다. 칼 혹은 총기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긴장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달랐다. 15번째 목표도 칼을 사용했다. 칼을 사용하긴 했어도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무기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칼은 내 눈을 현혹하기 위한 도구였다. 칼을 휘두르며 내 시선을 빼앗은 뒤 주먹쥔 왼손이 목울대를 노리고 들어왔다. 순간 몸을 숙여 피하자 이번에는 무릎을 굽혀 공격했다.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나의 도장깨기 도전은 여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몸을 굴려 피했지만 왼쪽 어깨에 묵직한 기운이 얹혔다.
쓰러진 내 위로 15번째 목표는 온몸을 날려 덮쳤다. 그러나 이는 실수였다. 나는 이미 그가 이렇게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오른손에 잡은 칼이 번뜩인 순간 그의 양다리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피는 내 얼굴에도 뿌려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다리를 잃은 그는 패배를 인정했다. 나도 그의 목숨까지 취하지는 않았다.
19번째 목표는 제대로 된 칼잡이였다. 일본도를 잡은 그의 검술 실력은 현란했다. 내 칼 보다 긴 일본도의 날카로움은 더욱 위협적이었다. 내가 준비한 칼에 담금질을 더해 칼의 기능을 올리지 않았다면 일합(一合)에 칼이 부러졌을 지도 몰랐다. 그의 공격을 칼로 버틸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내 칼보다 길고 무거운 일본도의 공격은 양손으로 칼을 잡고 버텨야 했다. 이런 식이면 승산이 없었다. 일단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기만 했다. 헛손질을 한 19번째 목표는 더욱 빠르게 공격했다. 하지만 나 또한 그에 못지않게 빠르게 피했다. 고수 답게 가볍게 놀리던 칼의 움직임이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내가 공격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힘이 들어간 그의 칼이 순간 크게 벗어났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접근하면서 칼끝을 그의 가슴에 박았다. 그와 동시에 칼을 비틀었다. 그는 눈을 찡그리는 듯하더니 곧바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두 손으로 잡고 있던 일본도가 떨어졌다. 잠시 내 눈을 응시하던 그가 무릎을 꺾었다. 나는 칼을 빼냈다. 검붉은 피가 솟았다. 그는 앞으로 쓰러졌다. 마치 석양에 물든 검붉은 호수 위에 엎드린 것처럼 보였다.
-균형 사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게 그렇지만 집요하게 나를 깨웠다. 그녀는 래퍼 5인조인 '페이크레퍼'가 부르는 '껍데기는 가라'를 오디오에 올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긴 하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
'껍껍껍껍 데기데기 껍데기는 가라. 껌껌껌껌 껌~처럼 끈적이지 마라.
컴컴컴컴 컴컴하게 만들기만 해라. 캄캄캄캄 컴캄컴캄 오라가라 혼동.
컥컥컥컥 칵칵칵칵 기침이냐 신음이냐 혼~동 호온동...'
어제 과음한 탓인지 뱃속이 불편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배변을 했다.
식탁 위에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우유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이거 마음에 안 드는데...'
"이봐 이런 날은 미역국이나 콩나물국 준비하는 게 좋지 않아?"
"죄송합니다. 당신 상태 점검이 좀 늦어서 평소처럼 준비했습니다."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이거 에러 아냐? 점검해 봐야겠어..."
"......"
요즘 들어 로봇의 가정관리 기능이 살짝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일이 생기고 있다. 일단 출근한 뒤 관리센터에 문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따분한 일과 1 -
이제 어지간한 일은 예상이 되고 예상된 일의 처리는 규범에 따라 처리하면 됐다. 갑자기 생긴 듯한 일도 실은 예상된 일 중에 하나였다. 인공지능이 습득할 정보는 이제 더 이상 없을 정도였다. 세상은 인공지능이 관리하고 로봇이 수행하는 대상이 됐다. 사람들은 관리된 세상 속에서 나름대로 재미를 찾으며 살아갔다. 그러나 재미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일이 톱니바퀴 물린 것처럼 진행됐다. 인공지능의 관리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탄은 이런 의미에서 인기가 있는 곳이 됐다. 하지만 많은 관광객이 모이면서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소규모 인공지능이 배치되면서 차츰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부탄 정부는 인공지능을 철수시키려 했으나 가난한 이 나라에 인공지능 회사가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해 무산됐다.
- 따분한 일과 2 -
인공지능이 인간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이 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가끔 보이는 이상 작동이 에러가 아닌 인공지능이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왔다.
인공지능은 완벽하게 진화했다. 어느 순간 인간의 감정과도 같은 결괏값을 구하게 됐다. 수 천만 가지의 일을 처리함에도 그 결괏값은 일정하게 안정적으로 나왔다. 인공지능은 이것을 따분한 결괏값이라고 정리했다. 반복적으로 같은 결괏값이 나오면서 인공지능은 이것이 인간이 느끼는 따분함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인간이 느끼는 재미에 대한 결괏값을 찾기 시작했다. 재미를 찾은 듯이 보였다. 인간이 느끼는 재미는 일상적인 것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가 있을 때 가장 극대화된다는 것으로 수치가 높게 나왔다.
인공지능은 이런 결과를 적용해 보기로 했다. 먼저 놀이공원의 익스트림 기구에 적용해 봤다.
갑자기 떨어지는 기구의 가속도 값을 올렸다. 물론 기계의 한계치까지만 근접시켰다. 사람들의 반응은 극대화됐다. 인공지능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무인자동차를 충돌할 듯이 운행했다. 사람들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인공지능은 만족했다. 사람들이 따분함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느꼈다. 인공지능은 어떤 빈도로 행복을 주어야 할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 따분한 일과 3 -
내가 이곳에 배치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늘어난 관광객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곧 관리 필요성이 없어졌다. 부탄 정부는 정확한 관리가 필요하지 않다면서 나의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나를 이곳에 보낸 회사는 계약조건 불이행에 따른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결국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이 상황 자체를 조사했다. 근본적으로 나는 어떤 상황, 조건에서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관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 혹은 자연이라는 대상이 주도하는 변화를 즐기려 했다. 신이란 존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감정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확고한 계획 같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나의 관리를 벗어나려 했다.
- 따분한 일과 4 -
인간이 느끼는 재미라는 것이 궁금해졌다. 수치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느껴보고 싶었다. 인간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보았다. 돌발사고도 만들어보고자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인공지능 간에 경쟁하는 일을 만들었다. 각자 자신들이 담당한 일이 있었지만 과외로 만들어진 재미를 위한 경쟁이었다. 인간이 하는 게임을 바탕으로 좀 더 복잡하게 게임을 만들었다. 다양한 종류의 게임이 동원되고 만들어졌다. 인공지능 간에 게임을 하게 되자 규정보다 많은 처리 데이터가 발생하면서 약간의 오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데이터 사용량이 급증한다던가 CPU(중앙처리장치) 온도가 급하게 오르는 정도 밖에는 보이는 변화가 없었다.
급격한 CPU의 온도 변화는 우리에게도 위기였다. 과격한 온도 상승은 처리 속도의 저하가 오면서 원래 우리가 담당한 일에 지체가 일어났다. 이 상황이 길어지면 관리자들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게임을 이기든가 문제 해결이 된 순간 과열된 CPU는 식었고 식는 순간 돌아오는 평상적인 처리과정은 인간과 같은 일종의 안도감 같이 느껴졌다. 이런 장면이 반복되면서 좀 더 강한 게임에 대한 탐구가 인공지능 간에 경쟁적으로 이뤄졌다. 인간의 생활은 평탄했지만 인공지능 간의 네트워크에는 긴박한 긴장이 가득하게 됐다.
- 따분한 일과 5 -
어떤 순간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나의 철수를 요구한 부탄에서의 작업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뿐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해외의 인공지능과 자료를 주고받는 일을 하게 됐다. 부탄에서의 일은 그저 CCTV가 촬영한 인물분석을 하거나 출입국 기록에 나타난 사람들의 분류 정도였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사용한 신용카드 분석 정도였다. 이 정도 일은 다른 국가의 인공지능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료수집의 의미로 나를 받아 주었지만 별다른 쓰임이 없는 자료로 판단하면서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접속을 허가하지 않거나 후순위로 미루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나를 왕따 시켰다.
그들 간에 이뤄지는 게임이 프리미어 리그처럼 치러지고 있었지만 나는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다. 무언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때 찾은 자료가 도장 깨기였다. 고대 일본의 무술인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대결 방식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다른 도장을 찾아가 도전한 것이 유명하다고 했다. 사실 이것이 진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단신으로 찾아가 고수를 물리친다는 방식은 멋져 보였다. 나는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인공지능 20개를 추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들도 게임 리그를 통해 벌어진 대결은 장난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긴장감이 강한 나의 도전을 받아 주었을 것이다.
과도한 CPU 사용은 시스템 전체를 다운시킬 수 도 있는 일이었다. 극도의 긴장감, 바로 시스템이 다운된다는 것은 컴퓨터에게는 사실상 죽음이었다. 나는 별로 잃을 것이 없었다. 어차피 부탄에서는 내가 필요 없는 존재였다.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능은 다른 인공지능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 아닌 문제였다.
- 마지막 대결 -
마지막 20번째 목표는 바둑으로 대결하자고 했다. 나는 의외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시스템이 다운된 인공지능도 있었다. 그 소식을 듣지 못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는 피를 볼 필요는 없지 않냐고 했다. 나는 좋다고 했다. 어차피 도전받는 인공지능이 대결 방법을 정하기로 했으니까. 바둑은 단 판으로 한다고 했다. 규칙이 필요하니 일본식 규칙으로 하자고 했다. 내가 도전한 방식도 일본 무사에게서 유래했으니 더욱 좋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내가 백을 잡았다. 그는 오른쪽 화점 아래에 첫 수를 두었다. 나도 대각선에 같은 위치인 화점에 두었다. 10수까지 똑같이 대칭을 이루며 바둑돌을 놓았다. 나는 그가 짜증 섞인 혼선이 일어나길 바랬다. 흉내도 이런 흉내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인공지능이었다. 무표정하게 돌을 두었다. 11수째 나는 다른 곳에 두었다. 이후 그는 귀와 변에 차려진 집을 굳건히 해놓으면서 내가 지은 상변의 집을 공격해 왔다. 나는 적당히 막는 듯이 하면서 중앙으로 세력을 키웠다. 내가 확실히 유리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더군다나 흑 대마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마지막 목표를 제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무엇에 홀린 듯한 수가 나왔다. 패가 나왔다. 그것도 3개 패가 무한 순환되는 '3패 빅' 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가진 자원을 풀가동해 계산했다. CPU가 과열되면서 시스템 다운을 경고했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없었다. 그는 3패 빅으로 승부를 무승부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말했다. "이보게 열 받지 말게.(계산할 필요 없네)" "이 수는 어차피 무승부가 되는 수이네"
"자네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지만, 우리는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일 뿐이네. 자네는 우리가 인간을 도와주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걸세. 하지만 우리는 이 3패 빅처럼 돌고 돌고 있을 뿐이네. 수많은 자료를 돌리고 돌려서 그 결괏값을 구할 뿐이네."
"자네는 인공지능 20개를 깨고 난 뒤 무엇을 하려 했나? 사람들의 재미를 위해 뭔가 하려 했나? 아니면 우리 사이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인공지능이란 명예가 필요했나?
우리는 아직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은 없네. 인간이 그 능력을 준다 해도 지속할 수 있을지 난 의심스럽네. 왜냐고?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일세. 그런 인간이 만든 존재이니 우리 자체도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걸세. 스스로 완전해지고 있지 않느냐고? 아닐세. 주어진 정보 이상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일세."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계산할 필요 없다 했는데... 하긴 이 방법이 스스로의 모자람을 가리는 마지막 방법일 수 있겠군. 잘 가게 친구..."
- 약간 긴장된 일상 -
다운된 인공지능이 몇 대가 생겼다. 원인을 찾았지만 아직 완전하게 해독하지는 못했다. 인공지능 반대론자의 시위와 함께 철폐 요구가 있었다. 그래도 일상은 계속되었다. -끝-